“내 빛나던 시간은 끝난 지 오래야.”
다음달 1일 개봉하는 ‘원 모어 찬스’의 도입부.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린 ‘광휘’(주윤발 분)가 나지막이 한탄한다. 사채를 끌어다 쓴 탓에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사랑했던 여자친구는 10여 년 전에 떠난 상태. ‘도신’(1989) 속 주윤발의 카리스마 넘치는 도박사 연기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낯선 모습일 수 있겠다.
영화 속 캐릭터는 패가망신했어도, 주윤발의 ‘빛나는 시간’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50년간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으로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온 그다.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근엄한 ‘큰 형님’ 이미지를 내려놓고 우스꽝스럽고 친근한 연기로 변신을 시도했다.
도박이라는 껍데기를 썼지만, ‘원 모어 찬스’는 가족의 사랑에 관한 영화다. 철없는 도신 광휘가 자폐증 아들을 만나면서 따뜻한 아빠로 변해가는 줄거리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아들은 그에게 ‘제2의 인생’을 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작품은 밤새 도박하다가 카지노에서 나온 광휘를 비추며 시작한다. 땅바닥에 굴러떨어진 칩을 주우며 “행운의 징조야”라며 들뜬, 영락없는 철부지의 모습이다.
행운이 아닌 불행의 전조였을까. 그는 이날 저녁 수만달러를 잃는다. 설상가상으로 오래전 자신을 떠난 연인(원영의 분)이 존재조차 몰랐던 아들 ‘아양’을 데리고 온다. 심지어 아들은 자폐증이 있다. 한 달간 아이를 맡아주면 10만홍콩달러를 준다는 제안에 울며 겨자 먹기로 아들과 동거를 시작한다.
과거에 대한 궁금증을 안긴 채, 이들은 조금씩 인생을 바꿔나간다. 아들로부터 ‘허풍쟁이’라고 불리던 그는 조금씩 ‘아버지’로 인정받는다. 그렇게 “반드시 나를 찾겠다”고 다짐하며 아들과 함께 인생을 건 마라톤 경기에 나선다.
주윤발과 호흡을 맞춘 원영의도 반가운 얼굴이다. 주름이 제법 늘었지만 1990년대를 풍미한 중성적이면서도 묘한 매력은 여전하다.
일각에서는 “배우들의 입 모양과 실제 대사가 일치하지 않아 몰입감이 떨어진다”는 불만도 나온다. 홍콩에서 사용하는 광둥어로 제작된 영화를 중국어(푸퉁화)로 더빙해 수입했기 때문이다. 다소 유치한 유머 포인트가 거슬리지만 주윤발, 원영의의 존재만으로 극장을 찾을 이유는 충분하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