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드라마 변두리로켓(일본명 '시타마치로켓·下町ロケット')은 2018년까지 7년에 걸쳐 '시즌 4'까지 제작됐다. 시리즈가 방영된 해마다 드라마 시청률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끈 덕분이다. 가진 건 기술 뿐인 영세기업 쓰쿠다제작소의 생존 분투기에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열광했다.
일본에는 386만개(2022년말 기준)의 기업이 있다. 이 중 99.7%가 중소기업이다. 일본 근로자의 69%는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쓰쿠다제작소가 거대기업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모습에 일본 시청자들이 감정이입하는 배경이다.
쓰쿠다제작소의 이야기는 드라마속 허구가 아니다. 실화다. 후쿠이현(福井?) 사바에시(鯖江市)의 후쿠이다테아미흥업(福井?編興業)이 쓰쿠다제작소의 실제 모델이다. '경편(?編·일본어로는 '다테아미')'은 스웨터를 뜨는 옷감 제작 방식이다.
사명에 경편을 쓴데서도 알 수 있듯 후쿠이다테아미는 1944년 설립한 섬유 회사다. 이 회사가 오늘날에는 인공심장과 인공혈관 등 바이오·헬스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기업으로 변신했다.
후쿠이다테아미 뿐만이 아니다. 최근 10년 동안 후쿠이 지역의 중소기업들은 '강소기업'을 넘어 '첨단 강소기업'으로의 진화를 서두르고 있다.
섬유 기업들은 주로 의료·헬스케어와 우주·항공산업으로 변신했다. 호쿠리쿠 지역(北陸·도야마 이시카와 후쿠이현) 최대 섬유 기업인 세이렌(セ?レン)은 의료와 우주항공, 스포츠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여성 속옷 전문기업인 군제(グンゼ)는 재생의료 산업에 진출했다.
후쿠이현의 대표 산업인 안경 산업의 변신도 눈에 띈다. 일본 최대 안경테 메이커인 샤르망(シャルマン)과 안경 부품 제조사인 와카요시제작소(若吉製作所)는 의료·헬스케어 산업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고 있다.
안경 만드는 기계를 제조하는 사바에정밀기계(鯖江精機)는 후쿠이현청, 세이렌과 함께 일본 최초로 '현립 인공위성 발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후쿠이현은 일본 중부 지역 동해안에 위치한 광역 지방자치단체다. 2020년 기준 인구는 76만6863명으로 47개 광역 지자체 가운데 43위다.
일본에서 존재감이 가장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일본의 1000년 수도 교토와 에도시대(한국의 조선시대와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던 이시카와현 사이에 끼어 있는 탓이다.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후쿠이현은 바닷가 절경 도진보(東尋坊) 외에는 딱히 떠올릴 만한 거리가 궁색한 지역이다. 도진보와 이 지역에 흔한 공룡 화석을 제외하면 보통의 일본인들에게 후쿠이현은 그저 원자력발전소의 고장이다.
1970년 일본 최초로 상업용 원전이 가동된 이래 15기의 원전이 자리잡고 있다. 간사이지역 전력의 50%를 공급하는 일본 최대 규모의 원전 지자체다.
후쿠이다테아미흥업이 있는 사바에시의 인구는 6만8363만명으로 인구 26만명의 현청 소재지 후쿠이시와 8만명의 지역 대표 도시 에치젠시에 밀린다. 하지만 패션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사바에시의 존재감은 상상 이상이다.
일본 안경테의 90% 이상이 사바에시에서 생산된다. 1905년 농한기의 부업으로 시작한 산업이 오늘날 일본 열도를 제패한 주산업이 됐다.
에치젠(越前)으로 불리는 사바에시 주변 지역은 예로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섬유산지 가운데 하나였다. 2~3세기 대륙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옷감 짜는 법을 전수했다. 전국시대 이 지역을 다스린 다이묘 아사쿠라(朝倉) 가문은 견직물 산업을 육성하고 보호했다.
일본의 근대화인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미국과 유럽식 견직물 제조법을 일찌감치 도입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폴리에스테르 같은 합성섬유 산업을 받아들였다.
1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후쿠이의 안경과 섬유산업은 '모노즈쿠리(モノづくり·'물건 만들기')'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제조업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을 끊임없이 단련해 어제보다 조금 나은 오늘을 매일매일 쌓아 나간다. 그 결과 어느새 몸집은 작지만 기술력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어 원청업체인 대기업조차 고개를 숙이는 '슈퍼 을'이 돼 있더라는 일본 중소기업의 전형적인 성공 모델이다.
오늘날 한국 중소기업이 가야할 길로 곧잘 소개되는 '강소기업'의 모델이기도 하다. 하지만 1990년 버블(거품)경제 붕괴 이후 후쿠이 지역 기업들은 강소기업에 안주해서는 생존이 불투명한 시대가 왔음을 실감하게 됐다. 강소기업으론 안된다..첨단강소기업으로②로 이어집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