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을 만든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82)의 대표작들을 좋아한다면, TV 시리즈 ‘미래소년 코난’에 열광한 세대라면, 2013년 그가 은퇴 작으로 발표했던 ‘바람이 분다’에 실망했을 수도 있겠다.
이전 작품들처럼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가상의 세계를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으로 펼쳐낸 게 아니라, 실존 인물의 꿈과 사랑을 어른의 관점에서 전기 영화처럼 묘사했다는 점에서다. 더구나 그 인물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주력 전투기인 ‘제로센’을 만든 미쓰비시의 비행기 설계사 호리코시 지로였다는 자체만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하고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지난 25일 국내 개봉했다. 개봉일 오전 9시 현재 예매 관객 수가 약 30만6000명에 달했다. 전작인 ‘바람이 분다’를 국내 극장에서 본 관람객 수(10만6546명)의 약 3배 수준이다. 이는 지난 7월 일본에서 이 작품이 먼저 개봉한 이후 전작과는 달리 하야오 작품답게 어른이 아닌 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현실이 아닌 이세계(異世界)가 주로 펼쳐진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거장의 신작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덕분이다.
이 작품에 실존 인물까지 나오지는 않지만, ‘태평양 전쟁’(1941~1945년)이란 시대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명시되는 것은 전작과 같다. 극 중 주인공인 11세 소년 마히토는 이렇게 독백한다. “전쟁이 일어난 지 4년째 어머니를 잃었고, 5년째 시골로 갔다.”
영화는 전시 대공습이 일어난 도쿄의 사이렌 소리와 폭발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히토의 엄마가 일하는 병원에 불이 난다. 소년은 붉은 불길이 넘실대는 밤거리를 헤치고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엄마는 세상을 떠난다. 1년 후 마히토는 엄마가 어릴 적 살았던 시골의 저택으로 이사한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마히토의 이모인 나츠코와 재혼한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소년의 표정에서 착잡함과 외로움이 묻어난다.
그런 마히토 앞에 이사 올 때부터 그의 주변을 맴돌던 ‘말하는 왜가리’가 나타난다. 어느 날 마히토는 사라져버린 새엄마 나츠코를 찾으러 신비의 탑으로 들어가고, 왜가리가 안내하는 대로 거침없이 다른 세계의 문을 통과한다. 이 순간부터 현실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가, 기존 하야오 작품에 익숙하다면 으레 기대했을 만한 기이한 세계가 펼쳐진다.
하야오의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결이 다른 영화 제목에 대한 단서도 극 중에 나온다. 마히토는 시골 저택에서 이삿짐을 정리하던 중 아동문학가 요시노 겐자부로(1899∼1981)가 1937년 발표한 청소년 소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발견한다. 마히토는 책 표지에 어머니가 아들에게 남긴 추천 글을 읽고는 눈물을 흘린다.
하야오 감독도 이 책을 어릴 때 즐겨 읽었고, 이번 작품에 포괄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하지만, 제목만 따왔을 뿐 소설과 영화가 내용상으로 겹치는 부분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세계에서 펠리컨들의 위협 속에서 만난 큰할아버지가 마히토에게 해주는 말이 ’교훈적‘으로까지 들리는 건 제목과 연관돼서다. “악의에 물들지 않은 돌로 너만의 탑을 쌓아가거라. 풍요롭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거라.”
다른 세계의 역경과 격랑을 헤치고 새엄마를 구해 무사히 현실로 돌아온 마히토. 종전 2년 후 시골을 떠나 다시 도쿄로 가족과 함께 돌아가는 소년은 '어떻게 살 것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이다. 3년 전 이사 올 때 조금은 불안해하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하야오 감독은 이번 작품의 원작이 되는 밑그림을 직접 그렸을 뿐 아니라 자전적인 요소를 많이 반영해 각본을 썼다고 했다. 큰할아버지의 조언을 되새기는 듯한 마히토의 표정에서 노(老) 감독의 모습과 삶이 비친다면 이런 이유에서다.
서사가 다소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다른 세계에서 마히토가 생전의 엄마라고 알아챘을 히미와 이별할 때 ‘너무 쉽게 헤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지브리 역사상 최장 제작기간(7년)과 최고 제작비를 들인 작품답게 넘실대는 불길이나 마히토의 표정 등 CG를 전혀 쓰지 않았다는 작화(作畵)의 완성도가 탁월하다.
하야오가 다른 세계에서 보여주는 시각적·서사적 상상력은 여전히 기발하다. 하야오 특유의 판타지 서사로 자신의 이야기와 철학을 완숙한 경지로 풀어낸다. ‘80대 하야오’에게 거는 기대를 충족시켜 줄 만한 작품이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