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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과 인텔이 장악하고 있는 PC용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에 반도체 기업들이 연달아 출사표를 던졌다. 인공지능(AI) 열풍으로 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영국 반도체 업체 ARM의 아키텍처(설계방식)가 후발 주자들의 시장 참여에 일조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24일(현지시간)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퀄컴은 이날 하와이에서 스냅드래곤 서밋 2023을 개최하고 PC용 CPU인 '스냅드래곤 X 엘리트' 플랫폼을 공개했다. 내년부터 노트북, PC 등에 탑재할 예정이다. 이메일 요약, 텍스트 작성, 이미지 생성 등 AI 기능을 더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설계됐다. AI 수요를 반영해서 개발한 것으로 풀이된다.
퀄컴의 스냅드래곤 X 엘리트 플랫폼은 AI를 중점에 두고 설계한 반도체다. 1초에 130억개 이상 매개변수를 보유한 생성형 AI 모델을 가동할 수 있다. 애플 M2보다 연산속도가 50%가량 빠르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퀄컴은 네트워크에 연결하지 않아도 AI 기능을 실행할 수 있는 기술인 '온디바이스 AI'도 신제품에 적용했다. 온디바이스 AI는 일반적인 AI 서비스와 달리 서버를 거치지 않고 PC나 스마트폰 내에서 자체적으로 데이터를 수집하고 처리한다. 데이터 이동을 최소화해서 더 빠르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아카시 파키왈라 퀄컴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이날 "PC용 반도체를 통해 모바일 컴퓨팅 시장의 새로운 리더가 될 것"이라며 "저렴한 가격과 낮은 전력 소모량으로 최고의 성능을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퀄컴뿐 아니라 엔비디아와 AMD 등 다른 반도체 업체도 CPU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이날 로이터에 따르면 세게 최대 AI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도 PC용 반도체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영국 반도체 설계업체 ARM의 아키텍처(설계방식)를 활용한 PC용 CPU를 2025년에 양산할 계획이다. 그래픽 반도체(GPU) 시장을 넘어 CPU 시장을 넘보고 있다.
로이터는 소식통을 인용해 "엔비디아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운영체제(OS)인 윈도우를 가동할 수 있는 CPU를 비밀리에 개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엔비디아의 경쟁사인 AMD도 PC용 반도체 시장에 참여할 계획이다. AMD도 ARM의 아키텍처를 활용한 PC용 반도체를 개발하고 있다.
반도체 기업이 공격적으로 PC용 칩 개발에 나선 것은 MS의 후방 지원 덕분이다. 애플이 PC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장해나가자 위협을 느낀 MS가 점유율을 방어하기 위해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는 설명이다. MS는 2016년 퀄컴과 협력해 윈도우를 ARM 아키텍처에서 가동할 수 있는 반도체를 개발해왔다. 2024년까지 윈도우 호환 반도체 개발을 퀄컴이 독점하는 조건이다.
반도체 기업의 시장 참여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곳은 인텔로 꼽힌다. 낮은 전력 소모로 효율성을 끌어올린 ARM의 아키텍처가 PC 시장까지 확장하게 되면 인텔 아키텍처 점유율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인텔의 아키텍처인 x86은 지금껏 PC 반도체의 '표준'으로 여겨졌다. ARM의 약진으로 인해 인텔의 아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평가다.
증권사 번스타인의 스테이시 래스건 애널리스트는 "엔비디아의 CPU 진출은 ARM 생태계를 본격적으로 키우는 계기"라고 분석했다.
반도체 기업들이 연달아 CPU 시장에 들어서자 ARM이 수혜를 입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저전력을 내세워 모바일 CPU 표준을 세웠던 ARM이 앞으로 PC와 노트북 시장에서 인텔을 무너뜨릴 기회를 잡았다는 설명이다. 애플은 앞서 노트북용 CPU인 M2 등 고성능 ARM 칩셋을 선보인 바 있다. 여기에 엔비디아, AMD, 퀄컴까지 가세하면서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는 사실상 ARM이 제패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날 ARM의 주가는 전 거래일 대비 4.3% 급등하기도 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