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대 연구소로 중년의 남자가 찾아왔다. 내놓은 명함을 보아하니 일본에서 제과업계 1위를 하고 있는 회사의 사장이었다. “제과회사 대표이사가 뭔 일로 용광로를 연구하는 교수를 찾아왔을까?” 하는 궁금증도 잠시, 자신은 울산 사람이고 일본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조국에 제철소를 짓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했다. 브라질이나 인도 같은 나라들도 이미 실패했던 제철소를 국민소득 200달러도 안 되는 후진국 한국에 짓는다? 진짜 철없는 소리 한다 싶었다. 그러나 간곡하고 진심 어린 부탁에 일단 팀부터 꾸렸다.
그 사장, 초기 자금으로 무려 3000만달러를 조성했다. 그렇게 가본 적도 없었던 조국의 제철소 계획 수립이 시작됐다. 시간이 흘러 구체적인 계획서와 자금조달 계획이 세워져 모국 정부에 보고했고, 긍정적인 회신을 받았다. 하지만 일이 엉켜버려 제철소는 그 계획서에 기초하되 국가가 직접 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나 싶었는데 그 제과회사 사장, 고향이 양산이라는 숯검정이 눈썹의 남자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국영제철회사 책임자라고 했다. 그리고 “김 교수, 그 탁월한 재능을 일본보다는 조국을 위해 사용하는 게 어떻겠소!”라고 강권했다. 그리고 그간에 준비한 모든 자료를 숯검정이 눈썹의 남자에게 넘겼다. 엄청난 돈을 투자했는데 이 양반은 속도 없나 싶었다.
교수의 아버지는 의령 사람이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는 1926년 시즈오카에서 태어났다. 지긋지긋하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도록 공부했고,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까지 됐다. 일본에서 태어나 공부하다 보니 한국어가 어눌한 그는 귀국 초기엔 고생 꽤나 했다. 1인당 소득이 일본의 10%에 불과했던 조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과학기술연구원에서 중공업실장을 맡아 제철소 계획을 구체화했고, 용광로 1호기 설계도를 다듬었다. 이듬해부터 포항제철 건설본부장을 맡았다. 한국 직원들은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는 제철소 건설을 그가 끌고 간 것이다. 그렇게 1973년 6월 용광로에서 검붉은 쇳물이 쏟아져 나오는 기적이 완성됐다.
인터넷엔 그 쇳물을 보면서 만세를 부르는 임직원들의 사진이 나돈다. 하지만 사진 속에 그는 없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바보 같은 동생들이 차별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당시엔 우리보다 형편이 나았던 북한으로 귀국해버렸다. 그 동생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꼬임에 잠시 북한을 다녀온 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엮이고 말았다. 동생을 보러 간 며칠이 징역 10년으로 돌아왔다. 무려 6년6개월의 옥살이 끝에 특사로 풀려난 그의 첫 번째 행선지는 포항이었다. 쏟아져 나오는 그 쇳물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해 조국으로 영구 귀국한다. 가족과 지인들은 미쳤냐고, 그런 고초를 당하고도 다시 가고 싶냐고 말렸지만 유창해진 한국어로 “나는 철을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내가 봐도 미친 게 아니면 철이 아예 없는 쪽이다.
엄혹하던 시절, 간첩죄로 실형을 살고 나온 사람을 다시 채용한 숯검정이 눈썹, 그 양반도 철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기술 담당 부사장을 맡은 이후 파이넥스 공법의 기반인 용융환원제철법을 개발해 기술을 가르쳐주던 일본 제철회사들을 멀찍이 추월하게 했다. 탄소 소재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기술 확보에 주력해 요즘 포스코 주가를 들썩이게 하는 2차전지 사업의 기초도 제공했다. 포항공대 건립도 그가 주도했고 퇴직 후에는 퇴직금 전액을 기부해 사단법인을 설립하고 산업 인재 육성에 힘썼다. 그리고 2013년, 그렇게 사랑하던 조국에서 영면에 들었다. 그의 조국은 1년 전인 2012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하고 그에게 사과했다.
숯검정이 눈썹의 주인은 박태준이고, 제과회사 사장은 신격호다.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자신이 겪어본 사람 중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가장 애국자라고 거듭 말했고,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만 이용했다. 교수의 이름은 김철우, ‘쇠 철(鐵)’에 ‘도울 우(佑)’다. 이름은 그렇게 남기는 법이다. 그 당시 10%에 불과하던 달러 기준 1인당 소득이 올해는 일본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애국은 이렇게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