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투자사 브라운브러더스해리먼(BBH)의 애널리스트 신순규 이사(사진)는 미국 뉴욕 월가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이라면 꼭 한 번은 만나게 되는 사람이다. 시각장애가 있는데도 베테랑 애널리스트로 월가에서 오랜 기간 살아남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월가의 금융회사들이 대규모 감원에 들어가면서 신 이사의 존재가 더욱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일 뉴욕 인근에서 만난 신 이사는 자신이 지금까지 월가에서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로열티”라는 의외의 대답을 내놨다. 월가는 100% 돈의 논리로 굴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아닌 사례도 적지 않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신 이사는 “브라운브러더스해리먼처럼 회사에 대한 로열티를 보여주면 오랜 기간 함께 일하는 경우가 있다”며 “회사가 어려울 때 보너스를 주지 않아도 회사를 지키며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BBH에 25년째 다니고 있다. 애널리스트로서 입지도 확고하다. 특히 채권 분야 전문가다. 신 이사는 하버드대(심리학 학사),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영학·조직학 박사) 등 명문대를 졸업한 뒤 월가 최초의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신 이사는 1990년 MIT에서 조직학을 공부하던 시절 월가와 인연이 닿았다. 당시 미국 의회가 미국장애인법(ADA)을 제정하자 각 기업은 장애인 채용과 승진 등에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인사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월가 기업들에 해당 컨설팅을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이름을 알렸고, JP모간에 입사까지 했다.
신 이사는 장애가 있는데도 오랜 기간 월가에서 살아남은 것은 업무 능력뿐 아니라 장애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 덕분이라고 자평했다. 그는 아홉 살 때 시각을 잃고 열네 살 때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장애인 학교의 초청을 받았는데 당시 미국 현지에서 신 이사를 지원해주는 미국인 부부가 있었다. 신 이사는 그분들에게서 ‘3일 룰’을 배웠다고 했다. 시각장애에 대해 슬퍼할 수는 있지만 그 기간이 3일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신 이사는 “당시 그분들은 자기 연민을 갖고 판단할 경우 잘못된 길을 가기 때문에 스스로 슬퍼하더라도 그 시간과 양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고 조언해주셨다”고 말했다.
신 이사는 자신이 받은 지원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2012년 설립한 자선단체 ‘야나(YANA·You Are Not Alone) 미니스트리’를 10년 넘게 꾸려오고 있다. 한국 아동양육시설(보육원)에서 사는 아이들에게 미국 유학 프로그램(YSAP)을 비롯해 교육·자립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YSAP를 통해 지금까지 8명의 아동이 미국 가정에서 머물며 유학했다. 소액으로 많은 사람을 돕기보다 적은 숫자라도 그들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택하고 싶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신 이사의 꿈은 한국에도 미국에 있는 밀턴허시스쿨과 같은 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밀턴허시스쿨은 저소득 취약계층 어린이를 위한 학교로 허시 초콜릿을 세운 밀턴 허시가 만들었다. 신 이사는 “아이들이 정부 보조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학교를 한국에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뉴욕=박신영 특파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