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로펌들이 학습을 통해 스스로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업무에 속속 도입하고 있다. AI가 직접 법률문서를 작성하는 등 ‘리걸테크’(법률정보기술)가 빠르게 고도화하고 있다는 평가다. 로펌들은 “리걸테크를 통해 업무 효율을 더 높이기 위해선 법원의 판례 데이터가 더 많이 민간에 개방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불붙는 AI 기술 경쟁22일 로펌업계에 따르면 법무법인 율촌은 생성형 AI 챗봇 ‘챗GPT’를 활용한 앱을 개발하고 있다. 매사추세츠공과대(MIT), 해외 로펌 등과 협업해 변호사 업무에 활용되는 챗 GPT의 신뢰성과 보안성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율촌 관계자는 “광범위한 법률 데이터를 활용해 문서 생성 등이 가능한 서비스를 곧 내놓겠다”고 전했다.
세종은 AI가 의견서, 소장 등 법률 문서를 정확하게 분류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지난 1월 신설한 ‘생성형 AI 태스크포스(TF)’를 중심으로 생성형 AI를 바탕으로 한 법률서비스를 개발하는 작업에도 한창이다. 이를 위해 국내외 유망 리걸테크 및 AI 스타트업과 협업 중이다.
AI 번역기술에 공을 들이는 로펌도 적지 않다. 광장은 최근 AI 번역 관련 빅데이터 학습시스템 구축 작업을 마치고 독자적으로 개발한 AI 번역기를 업무에 도입했다. 태평양도 자체 데이터로 스스로 학습해 번역 품질을 거듭 향상하는 AI 번역 툴인 ‘트라도스’를 지난해부터 사용 중이다. 법률 분야에선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문서의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김앤장 법률사무소는 디지털포렌식 관련 자료를 보관하는 서버에 AI e디스커비리(전자적 증거제시) 문서·음성기록 검토 기술을 적용했다. 이 기술을 통해 1주일에 100만 건 이상의 문서를 검토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화우는 지난 5월 스타트업 씨지인사이드와 ‘AI 입법정책 컨설팅 서비스’에 관한 업무협약을 맺고 기업을 대상으로 한 법률자문 품질 향상에 공을 들이고 있다. 부족한 판례…“하급심 판결문 공개돼야”리걸테크 고도화 바람이 거세지면서 “판례 데이터가 더 널리 공개돼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판례는 리걸테크의 수준을 좌우하는 기초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국내에선 하급심 판결문 내용을 확인하는 게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비공개 정보인 데다 법원에 열람 신청을 하려면 사건마다 부여된 사건번호를 알고 있어야 해서다. 열람할 때도 사건마다 비용이 든다. 이와 달리 미국에선 법원이 모든 판결문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누구나 ‘렉시스넥시스’ 등 민간 기업을 통해 하급심 판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정보 접근문제에 리걸테크 기업과 변호사단체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국내 리걸테크 시장의 성장 속도가 더디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법률서비스 플랫폼 ‘로톡’은 지난달 서비스를 이용한 변호사들이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받은 징계 처분이 취소되기 전까지 9년간 ‘불법 영업’ 논란에 시달렸다. 지난해 국내 리걸테크 시장 규모는 약 200억원에 그쳤다.
한 대형로펌 대표변호사는 “앞으로는 얼마나 우수한 리걸테크를 도입하느냐가 로펌업계 주도권을 좌우할 것”이라며 “방대한 판례 데이터를 리걸테크 발전에 적극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