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마무리된 전국금속노동조합 기아차지부의 임금·단체교섭 합의 내용을 두고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와 기아차지부가 갈등을 빚고 있다. 노동계에 따르면 지난 20일 현대차지부는 기아차지부를 향해 “왜곡된 정보로 갈라치기를 유발하지 말라”며 공개 경고까지 날렸다.
현대자동차그룹의 맏형격인 현대차의 노사가 지난 9월 2023년 임단협에서 잠정합의안을 도출하면서 향후 이어질 그룹사들의 노사 협상에 긍정적인 분위기가 펼쳐질 것이란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구도다.
문제의 중심엔 퇴직자에 대한 차량 할인 판매 제도(평생사원증 제도)가 있다. 지난해 기아차 노사는 대승적 차원에서 할인 혜택을 대폭 줄였다. 할인율을 30%에서 25%로 낮추고, 재구입 연한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고 구입 연령도 '평생'에서 75세로 상한을 설정했다. 기아차지부 관계자는 "당시 합의할 땐 현대차도 내년 교섭에서 평생사원증 혜택 축소를 노조에 강력하게 요구할 계획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 기아 임단협을 앞두고 지난 9월 먼저 합의에 이른 현대차지부는 예상과 달리 할인 혜택을 유지했다. 심지어 기본급 11만1000원(호봉승급분 포함) 인상, 성과금 400%+일시금 1050만원, 전통시장상품권 25만원, 주식 15주 등 역대 최고 수준의 '전리품'을 두둑이 챙겼다.
이에 교섭이 진행 중이었던 기아의 노조 조합원들의 회사에 대한 불만이 고조됐다. 노조 집행부 입장에서도 당혹스러운 결과였다. 선택지를 잃은 기아차지부는 배수진을 치고 교섭에 나섰다.
결국 기아차지부는 그간 "절대 내줄 수 없다"고 고집 부리던 단체협약의 '퇴직자 자녀 우선채용 조항' 개정까지 협상카드로 사용하면서 결국 현대차지부에 버금가는 성과를 얻어냈다. 특히 퇴직 직원을 최대 2년까지 고용하는 '베테랑 1+1' 고용 제도를 도입했고 주간 연속 2교대 50만 포인트까지 얻어냈다.
고무된 기아차지부는 소식지에서 “기아만의 교섭으로 현대차 넘었다” “그룹 서열화 분쇄를 쟁취했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룹 서열화를 언급한 것은 그룹사 내부에서 관행처럼 여겨지는 '현대차 맏형' 구도를 부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에 발끈한 현대차지부는 지난 20일 소식지를 통해 “(기아차지부가) 단체협약을 퍼주고 받은 게 자랑이 아니다”라며 비판했다. 기아차지부가 퇴직자 자녀 우선채용 조항을 개정해주고 퇴직자 차량 구입 혜택을 축소한 것을 꼬집어 '퍼주기'라고 지칭하고, 이를 대가로 결과물을 얻어냈다고 깎아내린 것이다.
기아차지부가 자랑한 '베테랑 1+1 채용 제도'에 대해서는 "(퇴직자가 기존에 일하던 공정에서 계속 근무하는) 제자리 작업이 아닌 회사가 입맛대로 지정한 공정"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이어 "기아차지부는 유독 현대차를 비교하며 '넘어섰다'는 자체 평가로 사측의 갈라치기 전략에 동조하는 모양새"라며 "이런 태도가 노노갈등으로 전이될 가능성을 높인다"고 기아차지부에 책임을 돌렸다.
현대차지부가 형제격인 기아차지부를 공개 비판한 건 이례적이다. 이런 양측의 민감한 반응은 올해 말 예정된 노조 집행부 선거 때문이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양 노조의 내부에선 다양한 계파와 현장 조직이 대권 경쟁 중이다. 실제로 기아차지부의 합의안 발표 이후 현대차의 현장조직인 '민주현장'은 "기아차 협상 잘하네"라는 제목의 소식지를 내고 현대차 집행부의 협상력을 비판하며 흔들기에 나섰다. 이처럼 양 노조의 집행부나 조직의 '재선'이 걸려 있는 문제라 예민할 수 밖에 없다.
현대차지부 관계자는 "양측의 갈등은 올해 선거가 끝날 때까지 더 확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양 지부의 엇갈린 행보는 최근에도 있었다. 양 지부의 상급단체인 전국금속노동조합이 진행한 지난 5월 총파업에서 현대차지부는 "총파업보다 내부 대오 정비가 우선"이라며 참여를 거부했지만 기아차지부는 참여했다. 반대로 7월 금속노조 총파업에서는 현대차지부가 참여했지만 기아차는 확대 간부 파업에 그치는 등 대오를 달리했다.
기아차 뿐만 아니라 타계열사들도 '현대차 맏형' 구도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현대차그룹 계열사 안의 6개 지회는 오는 24일과 26일 공동파업을 결정했다. 현대차·기아 직원에게만 지급된 600만원 상당의 특별성과급이 계기가 됐다.
한 계열사 노조 관계자는 "예전에는 계열사들이 현대차 임단협만 쳐다보고 있었다"며 "현대차 기준을 자신들의 임단협 교섭 기준점으로 삼는 관행이 당연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최근엔 '우리가 없으면 현대차가 성과를 낼 수 있나'며 불만을 품는 구성원들도 많이 늘어서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설명했다.
한편 노노 사이에 오가는 거친 언사와 느슨해진 연대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은 현대차그룹이다. 현대와 기아가 잇따라 노조에 '역대급 선물'을 안겨주는 출혈 경쟁을 펼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줄파업 예고였기 때문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지부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던 현대차그룹 노동조합의 연대가 깨질 수 있다"며 "다만 이런 현상이 회사에 마냥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미지수"라고 설명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