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아닌 감독이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웃사촌', 넷플릭스 'D.P.'까지 출연하는 작품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 조현철이 첫 장편 연출작을 내놓았다. 대중들에겐 어떤 작품에서도 돋보이는 연기력을 갖춘 배우로 기억되고 있지만, 연출은 조현철의 오랜 꿈이었다. 서강대 입학 후 영화를 하고 싶어 자퇴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입학했고, 영화를 전공했다. 이미 2010년 단편영화 '척추측만'을 내놓기도 했다. "거절당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밝혔을 만큼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가 나오기까지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공개 후에는 출연 배우를 둘러싼 논란과 우려가 쏟아졌다. 작품이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자그만치 6년이었다. 그런데도 '너와 나'를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조현철은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그동안 버텨온 원동력을 전했다.
영화 '너와 나'는 수학여행을 하루 앞둔 고등학생 세미(박혜수 분)와 하은(김시은 분)의 이야기를 담았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단원고 학생들의 실화를 모티브로 현실적인 여고생들의 고민과 다툼, 화해와 우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는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고, 올해 무주산골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다.
극 중 '안산', '단원고' 등의 지명과 학교명이 스쳐 지나가듯 등장하지 않는다면 '너와 나'와 세월호를 연관 지어 생각하기 힘들 만큼 작품 속에서 그날의 비극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배경에 대한 소개가 없다면 여고생들끼리 지지고 볶고, 화해하는, 그들끼린 나름 진지하지만, 어른들이 보기엔 그저 귀여운 발랄한 청춘 드라마로 보인다. 조현철은 "상실이나 쉽게 잊힐 수 있는 주변의 것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자 이 작업을 시작했다"며 "이 소재(세월호)를 소재 자체로 이용하는 것에 윤리적으로 거부감이 들어 은유적인 방식으로, 보편적일 수 있는 방식으로 다루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처음에 '이 영화를 찍을 거야', '수학여행을 하루 앞둔 두 여자아이에 대한 영화야'라고 하니 2016년엔 '세월호'라고 바로 알아챘는데, 그 후엔 뒤늦게 알더라"며 "이걸 얼마만큼 드러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며 실시간으로 계속 수정했던 거 같다"고 작업 과정을 전했다.
영화 속 대사들에도 섬세한 고민이 이어졌다. 조현철은 "놀이터에서 밤에 할머니와 손녀가 물웅덩이에서 인형을 줍는 장면이 있는데 출발은 제가 일상에서 본 모습이었다"며 "그때 할머니가 '물에 빠지면 어쩔 수 없어. 되돌릴 수 없어' 이러셔서 그 말을 듣고 썼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엄청난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얘길 듣고 '물에 빠진 걸 네가 구했네'라고 바꿨다"고 밝혔다.
'너와 나'에는 조현철의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고, 한예종 입시까지 함께한 배우 박정민이 등장하고, 친형인 매드클라운의 노래가 OST로 나온다. 조현철은 "2016년 노래 중 저작권 문제에서 자유로운 노래를 찾다 보니 형의 노래를 쓴 것"이라며 "형도 영화를 보긴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안 난다. 우리가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이는 아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조현철이 천재라 (한예종) 연기과로 전과했다"는 박정민에 대해서도 "천재는 그 친구"라고 치켜세우며 "'너와 나'에서도 거의 그 친구의 애드리브였다"며 "'진짜 잘 살리는구나', '프로구나',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알겠다' 계속 감탄했던 거 같다. 연출자로서 정민이를 화면에 던져놓으면 걱정이 사라진다"고 극찬했다.
'너와 나'는 학교 폭력 논란으로 활동을 중단했던 배우 박혜수의 복귀작이기도 하다. 세월호를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점보다 박혜수의 출연으로 더 화제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현철은 그런 박혜수에게 "미디어나 언론에서 접하는 걸로 그 사람을 다 알 순 없다"면서 돈독한 신뢰를 숨기지 않았다.
조현철은 "수많은 말들이 있을 거고, 이미지가 있다"며 "특히나 인간의 오래된 습성상 신에게 재물을 바치기 위해 예쁘장하게 옷을 입히고, 제를 올리고, 돌팔매질하지 않냐"면서 박혜수를 미디어와 대중의 재물로 비유하기도 했다. 이어 "저뿐 아니라 영화를 찍는 모든 스태프도 진심을 느꼈다"며 "하고자 하는 바대로 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세미와 하은의 우정이, 특히 세미가 하은에게 보내는 관심과 애정이 때에 따라 우정보다는 사랑에 더 가까워 보인다는 점에서 "퀴어 영화가 아니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조현철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부인하지 않았다. 조현철은 "두 아이의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며 "남녀가 아니더라도 보통의 일이고 평범한 일이었던 거 같다"며 "퀴어의 특이성을 표현하려 한 건 아니었고, 평범함을 구현하려는 과정에서 이 아이들이 결국에는 맞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너와 나'는 이미 오래전에 제 손에서 놓아준 느낌"이라는 조현철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마부인' 촬영과 함께 다음 작품을 구상 중이다. 앞으로도 연기와 연출을 병행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힌 조한철은 다음 작품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제주도에서 한 달 동안 머물렀다"고 전했다.
조현철은 "인간뿐 아니라 인간이 아닌 종의 이야기, 제주도 숲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 같다"며 "그것과 4.3사건을 엮어가고 싶어 계속 머릿속으로 굴려보고 있다"고 밝혀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도 끌어 올렸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