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진행자 지미 키멀은 객석의 배우들에게 “모두 너무 멋지다. 오젬픽이 나에게도 효과가 있을지 궁금하다”고 말해 청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할리우드 배우들은 물론 일론 머스크 등이 효과를 본 것으로 알려지자 비만 치료제 오젬픽과 위고비는 미국에서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세계 다이어트 산업은 물론 식품 산업의 지형도마저 바꿔놓을 기세다.
오젬픽과 위고비 개발 업체는 덴마크 제약사 노보노디스크다. 비만약이 히트를 치자 이 기업의 가치는 덴마크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3954억달러)도 훌쩍 넘어섰다. 시가총액 4600억달러를 돌파하며 프랑스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3739억달러)를 따돌리고 유럽 시총 1위에 올랐다. 인구 585만 명으로 서울보다 작은 나라에 삼성전자보다 큰 기업이 갑자기 탄생한 것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노보노디스크가 덴마크 경제를 재편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노보노디스크가 보여준 기업의 힘노보노디스크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업과 혁신의 힘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보여준다. 이는 갈수록 격차가 커지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경제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구 사회의 양대 축으로 일컬어지는 미국과 유럽은 이제 경제력으로만 비교하면 맞수라고 보기 힘들어졌다. 2012년 미국 GDP가 유럽연합(EU)을 추월한 이후 차이가 벌어져 지난해 27개 회원국 GDP 합계는 미국의 60%에 그쳤다. 이는 기업 경쟁력에서 비롯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글로벌 시총 톱10에 유럽 기업은 단 하나도 없다.
중국과 러시아 경제를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러시아가 중국에 비해 영토가 훨씬 넓고 자원도 많지만 경제력 측면에서는 중국을 넘볼 수 없다. 그 이유도 화웨이, 알리바바 등을 키워낸 기업가정신이다. 마틴 울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수석 칼럼니스트는 이런 논리를 기반으로 ‘피크 차이나’론을 반박했다. 그는 “매년 140만 명의 엔지니어를 배출하고, 세계에서 특허청이 가장 바쁘고, 기업가적인 면모를 갖춘 인재가 많은 중국의 강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썼다. 위기에 처한 韓 기업 경쟁력인류사에서 기업이란 조직이 등장한 것은 정부, 군대, 교회 등에 비해 꽤 나중의 일이다. 하지만 근대 기업의 등장 이후 인류 발전에 가속도가 붙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기자들은 책 <기업, 인류 최고의 발명품>에서 “자본주의 사회 구성 요소인 국가, 기업, 소비자 가운데 기업은 사회적 부(副)를 창출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했다. 기업은 인적·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결합해 개인은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경제적 성과를 만들어낸다. 현대 문명을 바꿔놓은 주역인 셈이다.
한국을 가난에서 구하고, 10대 경제 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것도 기업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K팝 열풍도 하이브 등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 기업들은 서구 기업들과는 또 다른 능력을 보여줬다. 예측하기 힘든 정치권의 영향력, 반기업 정서, 징벌적 규제 등을 뚫고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최근 지경학적 리스크와 세계 정치, 경제 질서의 급속한 개편으로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은 언제 어떻게 추락할지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우리 경제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 기업을 병들게 하는 자가 누구인지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