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엔 생소한 광경이 펼쳐졌다. 100여 명의 청중이 객석이 아닌 무대에 올라가 나무로 된 단상 위에 옹기종기 모여앉았고, 연주자들도 평소와 달리 객석을 등진 채로 연주를 들려줬다. 피아니스트가 페달을 밟으며 생겨나는 진동의 세기가 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느껴졌고, 첼리스트가 활을 현에 세게 내려치면서 생겨나는 송진 가루의 묘한 향이 바람을 타고 연신 코를 간질였다. 연주자와 청중 사이의 경계(境界)를 없애고자 2002년 서울 연희동 자택 거실에서 시작한 마룻바닥 음악회, ‘하우스콘서트’의 1000번째 공연 얘기다.
오후 8시. 공연은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이 이끄는 실내악단 ‘에라토 앙상블’의 모차르트 교향곡 1번 연주로 문을 열었다. 모차르트가 열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작곡한 이 작품엔 신동의 발랄함과 활기가 온전히 담겨있다. 양성식은 시작부터 강한 추진력과 유려한 선율 진행으로 악단을 통솔하면서 작품 특유의 역동적인 악상을 살려냈다.
다만 작품의 전경과 후경을 담당하는 악기군의 대비와 셈여림 차이가 옅게 표현되면서 다소 평면적인 인상을 남겼다. 이번 공연에선 에라토 앙상블 연주자가 26명으로 가장 많았는데, 이들이 한꺼번에 무대에 오르다 보니 청중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최단 거리 세 뼘) 음향적 균형감이 깨지는 등의 한계도 있었다.
다음 무대는 올해 영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11세 첼리스트 김정아의 연주였다. 15세의 조성진, 17세의 임윤찬 등 신예들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하우스콘서트가 점찍은 또 하나의 클래식 샛별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 연주에선 깔끔한 음색과 섬세한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게 연주하는 기법)으로 바흐 특유의 정제된 아름다움을 펼쳐냈고, 솔리마의 ‘라멘타치오(애가)’에선 매끄러운 첼로 선율에 자신의 목소리를 덧입히면서도 기교적으로 흐트러지지 않는 연주로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줬다.
2021년 프라하의 봄 국제 콩쿠르, 올해 모차르트 국제 콩쿠르에서 잇따라 정상을 차지하며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은 현악 4중주단 ‘아레테 콰르텟’도 무대에 올랐다. 이들이 들려준 곡은 하이든의 ‘러시아 4중주’ 중 하나인 현악 4중주 29번 G장조였다.
아레테 콰르텟은 통일된 호흡으로 시종일관 따뜻하면서도 생기 있는 울림을 들려줬다. 첼로와 비올라는 끊임없이 서로의 소리에 반응하면서 적절히 무게감 있으면서도 정제된 음향을 만들어냈고, 그 위로 올라선 제1 바이올린은 우아한 음색과 시원시원한 보잉(활 긋기)으로 선명한 선율선을 그려내면서 작품 특유의 싱그러운 에너지를 뿜어냈다. 3악장에선 명료한 리듬 표현으로 익살스러운 분위기를 살려냈고, 4악장에선 활을 긋는 속도, 장력, 비브라토의 세기 등에 변화를 주면서 곡의 다채로운 색채를 완연히 드러냈다.
2014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 2015년 부소니 국제 콩쿠르에서 연이어 우승한 피아니스트 문지영은 바흐의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를 들고 무대에 나섰다. 그는 첫 소절부터 깨끗한 음색과 섬세한 타건으로 바흐 특유의 견고한 구조와 짜임새를 찬찬히 풀어냈다. 불필요한 움직임이나 과도한 표현은 모두 배제하면서도 주요 선율에 풍부한 색채를 덧입히면서 음향적 입체감을 만드는 일은 놓치는 법이 없었다. 주선율과 이를 장식하는 악구를 섬세히 구분하면서 유려한 흐름을 들려주다가도, 양손으로 하나의 주제 선율을 주고받으면서 정교하게 화성을 쌓아가는 그의 연주는 숨을 쉬이 내뱉지 못할 만큼의 긴장감을 선사했다.
이날 공연엔 오르가니스트 박준호, 생황 연주가 김효영, 하피스트 황세희, 퍼커셔니스트 김정균, 색소포니스트 브랜든 최, 피아니스트 문재원, 작곡가 겸 지휘자 최재혁이 이끄는 현대음악 전문 연주 단체 앙상블 블랭크 등도 함께 올랐다.
“소박한 듯 노블하게(고결하게), 조용한 듯 열정적으로.” 지난 21년간 유지해 온 하우스콘서트의 철학이다. 1000번째 공연도 어김없이 그랬다. 연주자의 숨소리가 하이든의 선율과 뒤섞여 고결하게 빛났고, 악기가 일으키는 진동이 바흐의 화성과 어우러져 열정적인 에너지로 살아난 무대였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