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내전 후 폐허된 중국…강력한 통제로 경제 회복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입력 2023-10-14 08:46
수정 2023-10-16 17:59

1949년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본토의 기반이 모두 파괴돼 경제가 사실상 마비됐습니다.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가치는 바닥을 쳤고, 시장경제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중국 정부는 인플레이션 통제, 통화 시스템 재건을 최우선 경제과제로 삼았습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통화 체계를 통일하고, 신용을 강화했습니다. 아울러 지방 정부의 예산을 제한하여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두면서 화폐의 가치를 보장하려고 노력했습니다.

3년에 걸친 노력으로 중국 공산당은 초고속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중국 본토를 장악한 새로운 정부의 정통성에 일조했습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시기를 제외하면 마오쩌둥의 통치 기간 중국은 위안화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했습니다.

물가를 잡은 중국은 국영 무역 기관을 설립해 규제를 시작했습니다. 이 기관들은 다른 사기업들과 경쟁하며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기관을 시장 재구성·재통합을 위해 활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돈의 가치가 안정화하는 흐름을 보였습니다.

무역과 상업을 통제하는 동시에 중국 정부는 중앙은행을 만들어 중앙 집중화된 은행 체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중국은 1948년 12월1일 허베이은행(?北?行), 베이하이은행(北海?行), 시베이농민은행(西北?民?行) 등 세 은행을 합병해 중국인민은행을 발족했습니다. 기존에는 이 세 은행이 각자 화폐를 발행하고 유통했는데, 이를 통합한 것입니다.

이후 1950년 마오쩌둥은 모든 은행을 국유화했습니다. 중국인민은행은 결제 청산, 및 창구 서비스 등 실질적인 은행 업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됐습니다. 또한 1953년 중국인민은행은 외화와 국제 거래도 독점하게 됩니다. 이후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상업은행이 영업 재개를 허락받았고, 중국인민은행은 중앙은행으로의 기능을 남긴 채 역할이 축소됐습니다.

이처럼 1949~1952년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이 통제하던 기업을 국유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1952년 중국 국영 기업들은 전체 산업 생산량의 40% 이상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산업 생산 수단을 국가로 이전하면서 열악했던 노동조건이 개선됐습니다. 국영 기업의 노동자들은 정규직, 8시간 근무제, 의료 혜택, 보조금 지원 식품 및 주택, 그리고 다양한 국영 기업에서 일관된 8단계로 구성된 임금 체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국공내전 중 시작된 전국적인 토지 개혁 운동은 전쟁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그 결과 경작할 수 있는 토지의 약 45%가 부유층에서 빈곤층으로 재분배됐습니다. 한 지역에서 토지 개혁이 완료되면, 농민들은 서로 협력해서 농사를 지어야 했고, 각각 여섯 또는 일곱 가구로 구성된 작은 '상호 원조팀'을 만들었습니다.

1952년엔 중국 전체 농가의 38% 정도가 '상호 원조 팀'에 속하게 됐고, 식량 생산이 안정화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 정부는 물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 산업과 농업 생산량은 국공내전 이전의 수준을 회복했습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영대 교수, 메타버스금융랩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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