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7000억 원을 장학재단에 쾌척한 이종환 전 삼영화학그룹 회장이 지난달 13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름답고 의미 있는 기부를 실천한 고인의 삶은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던졌습니다.
고인은 1924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습니다. 광복 후 동대문시장 보따리 장사를 거쳐 1958년 삼영화학공업사를 차렸고,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10여 개 회사를 거느린 삼영화학그룹을 일궜습니다. 2000년 장학재단을 통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정하고 사재(개인 재산) 1조 원을 털어 2002년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지금까지 이 재단의 도움을 받은 장학생이 무려 1만2000여 명에 이릅니다.
이종환 회장 외에도 장학금을 대학 등에 기부하는 분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힘든 일을 하며 어렵게 모은 돈을 선뜻 내놓아 더 큰 감동을 주는 분도 많습니다. 연말이나 사회적 재난이 발생하면 자신을 숨기면서 어려운 분들을 위해 써달라며 금품을 기부하는 ‘익명의 기부자’가 줄을 잇기도 합니다.
기부는 타인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이나 물품을 내놓는 일입니다. 스스로 경제적 손해를 선택하는 것이니, 비경제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드는 동기(기부 동기)는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이 회장 같은 고액 기부자가 말하는 기부 행동의 이유와 의미를 살펴봅시다. 기업이 기부하는 이유를 대리인비용이론과 가치확대이론으로 따져봅시다.'베푸는 기쁨' 같은 내적동기만큼
세제혜택 등 외적동기 커야 기부 활성화
우리나라에서 기부를 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개인은 기부한 금액을 국세청에 신고하면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매년 국세청이 발표하는 <국세통계연보>에는 이렇게 신고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2021년 기준 개인 기부자는 127만 명이고, 이들이 기부한 금액은 3조7000억여 원입니다. 국세청에 종합소득을 신고한 사람이 933만 명이니 이들 중 기부자 비율은 13.6%에 불과합니다. 기부 금액은 국내총생산(GDP) 2080조2000억여 원의 0.17% 수준입니다. 기부자와 기부금 모두 많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한국, 세계기부지수 88위
영국 자선지원재단(CAF)은 매년 세계 119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세계기부지수’를 발표합니다. 기부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기준으로 한 ‘기부자 비율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지난해 응답자의 36%가 기부했다고 답해 119개국 중 45위를 차지했습니다. 1위는 84%의 인도네시아이며 영국 5위, 미국 9위, 중국 51위, 일본 103위 등이었습니다. 이 같은 기부자 비율과 자원봉사자 비율, 모르는 타인을 도운 사람 비율 등을 모두 고려한 종합 기부지수 순위에서는 우리나라가 88위에 그쳤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국민의 기부 수준이 낮은 이유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정신이 부족한 점, 혈연·지연·학연 등을 우선시하는 연고주의가 강해 다른 집단에 대해 배타적인 점, 기부가 일회성 행사로 이뤄져 일상생활 속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한 점 등이 꼽힙니다.
내적 동기가 외적 동기보다 중요
사회 전체적으로 기부 수준이 낮더라도 누군가는 기부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기부를 할까요. 사람들이 기부하게 만드는 동기(기부 동기)가 강할수록 기부를 실행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사회학에서는 기부 동기를 사회교환이론과 자아확장이론으로 설명합니다.
사회교환이론은 개인이 지출하는 비용에 비해 보상이 얼마나 돌아올지를 고려해 행동 여부를 결정한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기부금에 세금 혜택이 주어지면 기부 동기가 강해진다는 것이죠. 자아확장이론에 따르면 타인을 자신의 자아 영역에 포함시키면서 자아를 확장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자아 확장은 이타심과 이기심의 경계를 약하게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이타적 행위인 기부에 참여하게 하는 기부 동기가 강해지는 거죠.
기부 동기를 외적 동기와 내적 동기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외적 동기는 세금 혜택 같은 외부 요인이 기부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사회교환이론의 설명과 유사합니다. 내적 동기는 기부를 함으로써 느끼는 행복감이나 자신이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만족감, 기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기부 여부를 좌우한다는 설명입니다. 자아확장이론과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 기부 행동에서는 외적 동기보다 내적 동기가 중요하다는 연구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용규 중앙대 명예교수 등이 성인 436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기부를 활성화하려면 내적 동기를 강화하는 전략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재산은 줄어도 마음은 더 커져”
내적 동기의 중요성은 이종환 전 삼영화학그룹 회장도 강조했습니다. 그는 자서전 <정도(正道)>에서 기부 이유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사회 환원의 결단이 서자 재산을 정리해서 재단에 넣는 절차를 숨 가쁘게 밟아나갔다. 한 건씩 넣을 때마다 내 재산은 줄어들었지만 내 마음은 더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사람들은 나를 바보라 할지 모른다. 그것은 베풂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인생은 어차피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빈손으로 왔다가 손을 채운 다음 갈 때는 빈손으로 가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나는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베풂의 기쁨은 내적 동기의 행복감입니다. 이 회장처럼 베풂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많아져서 우리 사회가 더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NIE 포인트1. 개인기부자와 기부금액을 정리해보자.
2. 내적 동기와 외적 동기를 설명해보자.
3. 이종환 회장의 기부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기부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해야지
기부하라는 강제와 압박은 옳지 않아요
이종환 전 삼영화학그룹 회장처럼 큰돈을 기부하는 분을 가리켜 고액 기부자라고 합니다. 이 회장이 아름답고 의미 있는 기부로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던진 것처럼 고액 기부자는 모범적 사례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우선 큰돈(고액)이라는 사실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기부에 얽힌 특별한 사연이 더해지면 영향력이 더욱 커집니다. 그런 영향력은 자기 욕심보다 다른 사람을 위하려는 고액 기부자의 마음에 많은 이가 공감함으로써 기부 문화가 활성화되는 효과로 구체화됩니다.
고액 기부자 모임 ‘아너 소사이어티’
기부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자선단체들은 고액 기부자를 참여시키는 모임(클럽)을 만들기도 합니다. 미국 공동모금회인 유나이티드 웨이 오브 아메리카는 ‘토크빌 소사이어티’라는 고액 기부자 클럽을 운영합니다. 워런 버핏, 빌 게이츠 등이 회원입니다.
우리나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토크빌 소사이어티를 모델로 2007년 ‘아너 소사이어티’라는 고액 기부자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전체 모금액 중 개인 기부액의 비중이 30% 수준으로, 미국(80%)과 세계 평균(69.5%)보다 낮은 상황을 개선할 목적이었습니다.
아너 소사이어티에는 1억 원 이상을 기부했거나 5년 이내 납부하기로 약정한 개인이 회원으로 참여합니다. 현재 3238명이 회원이고, 이들이 약정한 기부 금액이 3702억 원입니다.
“돈이 더 가치 있게 쓰이길”
고액 기부자는 어떤 이유로 기부를 하고, 자신의 기부 행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요. 박주홍 부산복지개발원 책임연구위원 등은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 원 이상을 기부한 8명을 심층 면접하고 그 내용을 분석했습니다. 고액 기부자 8명은 모두 사재(개인 재산)로 기부했습니다. 이들은 “(나는) 부자가 아니다. 기부는 돈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러면서 고액 기부의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 (사회로부터) 받았으니까 돌려줘야 한다”, “돈이 좀 더 가치 있게 쓰였으면 해서다”, “다른 사람들이 기부하는 모습을 보고 부러웠고, 나도 기부하면서 뿌듯함을 느껴보고 싶었다”라고 털어놨습니다.
자신의 기부 행동에 부여하는 의미와 관련해서는 “기부는 자기만족이다.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자식에게 모범을 보이는, 가장 좋은 교육이다”, “내가 나태해지지 않게 만드는 계기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부끄럽지 않게 하도록 만드는 기분 좋은 족쇄다”라고 말했습니다.
기업 기부 강요는 사회 전체적으로 도움 안 돼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중 약 절반(48.2%)은 기업인입니다. 이들은 개인 자격으로 개인 재산을 기부합니다. 기업인 개인이 아닌, 기업이 법인 자격으로 기부를 하기도 합니다. 기업은 왜 기부를 할까요. 대리인비용이론은 기업의 경영자들이 회삿돈으로 기부함으로써 자신의 개인적 명성이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식으로 기부금이 과잉 지출되면 그것은 기업가치 감소로 이어지는 대리인비용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가치확대이론은 기업의 기부행위도 주주들을 위해 기업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기업의 기부가 단순한 이타적 행동이 아니라 이익 추구를 위한 행동이라는 겁니다. 기부를 함으로써 기업의 이미지가 개선되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기업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는 설명입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기업의 기부행위는 대리인비용이론 관점에서도 부분적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가치확대이론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합니다.
기업의 기부와 관련해 몇 년 전 ‘자발적 이익공유’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여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코로나19 사태로 이익을 본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그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라는 압박이 심했습니다. ‘자발적’이라고 포장된 사실상의 기부 강요였습니다. 고액 기부자들의 말처럼 기부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주를 위해 기업가치를 키워야 하는 기업이라면 강제와 압박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NIE 포인트1. 아너 소사이어티를 정리해보자.
2. 가치확대이론 관점에서 기업 기부를 설명해보자.
3. 기업에 대한 기부 강제의 문제점을 생각해보자.
장경영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