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수석경제보좌관을 10년이나 지낸 최측근이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탈원전 등 에너지정책 실패를 시인했다. 그는 “탈원전 결정 후 러시아 가스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다”며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당연히 달리 행동했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정책 실패로 러시아산 가스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됐다”고 패착을 인정했다.
독일의 ‘탈원전 반성’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일이다. 대표적인 진보 성향 주간지 슈피겔도 얼마 전 “환경론자 압력에 원전 위험성은 과대 평가하고 에너지 종속 위험성은 무시했다. 그렇게 푸틴의 덫에 빠졌다”고 했다. 이들이 고개를 숙인 것은 독일이 손꼽히던 경제 모범국에서 ‘유럽의 병자’로 전락 중인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들어서일 것이다.
EU의 올 성장률이 0.8%로 예상되는 가운데 독일은 역성장이 기정사실화됐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5개 싱크탱크는 독일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최근 -0.6%로 내렸다. 6개월 전 전망치(0.3%)보다 0.9%포인트나 하향한 수치다.
탈원전에 집착한 에너지정책 실패로 보자면 한국도 독일 못지않다. 문재인 정부는 에너지 교조주의에 빠져 원전 대비 발전비용이 각각 7배, 8배인 태양광·풍력에 5년간 45조원이라는 천문학적 정부·민간자금을 쏟아부었다. 간헐성, 변동성이라는 태양광과 풍력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격이 폭등한 액화천연가스(LNG) 발전량도 34%나 확대했다. 한국 경제가 당면한 물가 급등, 저성장 고착화도 탈원전과 무관하지 않다.
빗나간 에너지정책의 후폭풍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전력의 최근 9분기 누적 적자는 무려 47조원이다. 급전 조달을 위해 쏟아내는 한전채가 금융시장을 뒤흔드는 것을 넘어 산업계도 연쇄 타격하고 있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등 글로벌 경제·안보 전쟁에 대비한 국가적 프로젝트 차질도 불가피하다. 독일에선 반성이 봇물이지만 그 정책을 베낀 한국 탈원전 주역들은 오늘도 침묵 뒤로 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