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려놓은 판 '330조'…근로자 무관심만 탓하기엔 구멍 '숭숭' [빈수레 디폴트옵션②]

입력 2023-10-08 11:24
수정 2023-10-08 13:53

2005년 도입된 퇴직연금은 2023년 적립금이 330조원에 달할 만큼 큰 규모로 성장했다. 근로자 노후에 필수적인 제도로 자리잡고 있다. 노후에 도움을 더하겠다고 한국형 디폴트옵션가 시작됐지만, 대다수 근로자들은 무관심한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근로자들만 탓할 수는 없는 문제다. 사업자들도 백점짜리 안내 서비스를 제공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회사별 디폴트옵션 지정 현황을 취합하고 있다. 은행과 증권사들로선 '지정률' 자체가 성과지표가 된다. 사업자들로선 원금 보장형이든 실적 배당형이든 관계없이 일단 지정률을 높이는 게 관건인 셈이다. 때문에 단순 사정지정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소비자들이 계속되는 전화·문자 등 안내에 심리적 압박을 느껴 위험 부담이 적은 원금 보장형을 택하게끔 유도하는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디폴트옵션은 유예기간을 포함해 1년 넘는 시간을 벌었는데도 취지를 살리지 못한 만큼 정부가 얻은 성과는 낙제점에 가깝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기업이 퇴직연금 수익률 높이기에 비상을 걸고 홍보 활동과 상품 차별화에 힘을 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더불어 구멍 많은 제도를 개편하는 게 궁극적인 대안이 될 것이라 조언한다.
시작부터 구멍 뚫린 제도…실패한 日사례 답습 우려 한국의 디폴트옵션이 근로자에게 전적으로 운용지시 선택권을 주는 '옵트 인(선택적 진입·opt in)' 방식을 취했다는 게 가장 큰 결함으로 꼽힌다. 옵트 인은 사전에 동의한 사람에게만 조치를 취하는 정책이라면, '옵트 아웃'(선택적 탈퇴·opt out)는 조치를 모두에게 적용하되 사전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만 제외시키는 것을 말한다.

오래 전부터 디폴트옵션을 도입·운영해 온 미국과 호주 등은 옵트 아웃 방식을 취했다. 회사가 최선의 조건으로 디폴트옵션을 제시하면 근로자는 이를 거부하지 않는 한 해당 상품에 자동 가입되는 식이다. 일단 상품에 강제로 가입하게 하는 게 '기본값'인 셈이다. 미 정부는 디폴트옵션 상품 운용 과정에서 손실이 나더라도, 회사가 소송 등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면책 조항도 뒀다. 미국에선 디폴트옵션이 회사 주요 복지수단으로 여겨지는 만큼, 이런 조항이 생기자 그간 도입을 망설여온 많은 회사들이 인력 유치를 위해 디폴트옵션을 적극 들이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형 디폴트옵션은 기본값 자체가 '제도 밖'이다. 퇴직연금을 굴릴 상품을 미리 지정하는 건 똑같지만 '운용할 상품을 누가 정하는가'가 다르다. 회사가 디폴트옵션을 설정해주지 않고 근로자가 직접 금융사가 제시한 상품들 중 선택하도록 한 것이다.

한국도 퇴직연금 사업자와 사용자(회사), 근로자 중 누가 설정 권한을 질 것인가를 두고 국내에서 뜨거운 논의를 이어갔지만 그 결론은 근로자였다. 개별 기업들은 금융기관이 아닌 만큼 디폴트옵션을 설정할 역량이 없고, 사업자는 면책도 안 되는 상황에서 근로자로부터 소송당할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단 이유에서다.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가운데 근로자가 가장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된 셈이다. 물론 근로자가 상품을 직접 선택할 수 있단 점에서 선택권이 넓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그만큼 신경써서 골라야 하기에 신중한 선택이 요구된다.


전문가들은 현행 우리 디폴트옵션의 옵트 인 방식은 '스스로 운용지시가 없는 경우 강제적으로 운용지시권을 행사한다'는 제도의 취지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개인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 때 상태가 제도 안이냐 밖이냐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부른다"고 말했다. 그는 "판매사들로부터 지정을 권유 받는 전화 세례에 시달리는 근로자들은 자기 선택으로 손실을 냈을 때의 부담감, 고금리 상황 등을 생각해 원리금 보장형을 택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은행, 증권사들은 빠른 지정을 위해 유선으로 은근히 원리금 보장형 가입을 권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디폴트옵션에 원리금 보장형을 포함시킨 곳은 한국과 일본 두 곳 뿐이다. 우리나라보다 4~5년 먼저 빨랐던 일본은 저수익률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답보 상태에 빠졌다. 일본은 적립금을 방치하는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2018년 5월 디폴트옵션을 도입했다. 하지만 증권 업계가 취합한 자료에 따르면 여전히 수익률은 1% 안팎으로 매우 낮고 원리금 보장형에 머물러 있는 가입자는 80%대에 달하는 상황이다.

한국과 일본은 자산운용에 대한 국민의 저위험 선호도가 다른 나라 대비 크게 높은 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규성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연구원은 "2020년까지의 자료를 보면 일본의 운용 수익률은 미국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등 격차가 확실히 크다"고 말했다.

한국이 일본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선 어떤 노력들이 필요할까. 원리금 보장형을 제외시키는 게 대안이겠지만 이는 제도 변경이 필요해서 현실적으로 어렵다. 우리나라가 일본을 벤치마크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미 치열한 업권 간 경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정부와 업계가 대국민 홍보에 열을 올리는 방안이 최선책으로 거론된다."가입자 맞춤교육·규약변경 절차부터 개선해야"업계 관계자들 또한 디폴트옵션 안내 과정에서 사업자들이 근로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고 적극적인 홍보와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박종원 서울시립대 교수는 논문 '국내 퇴직연금의 운용성과 제고를 위한 제도 개혁방안'에서 제도의 정착과 활성화를 위해선 연금사업자가 디폴트옵션 상품군에 대한 충분한 사전 설명과 교육을 제공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업자들은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앞서 위험수용도나 재무상태, 연령대 등 가입자 집단과 개인의 특성을 충분히 파악해야 한다"며 "한 번의 교육에서 끝나지 않고 주기적으로 모니터링을 하면서 운용성과와 위험 요인을 점검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효근 신한투자증권 OCIO센터 부서장은 "일부 기업들은 퇴직연금 의무 가입 대상인 300인 이상의 사업장에만 적극적인 교육을 벌이는 등 선별적인 안내 활동을 벌이고 있다"며 "교육과 안내가 필요한데도 외면받는 사각지대 기업들이 많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퇴직연금 사업자들의 교육을 개개인이 빠짐 없이 들을 수 있도록 독려하고 눈높이에 맞게 추가 안내를 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업계가 디폴트옵션 상품군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민주영 신영증권 연금사업본부장은 "기업들은 혼합형펀드가 아닌 타깃데이트펀드(TDF) 조합으로 포트폴리오를 짜고 있다"묘며 "TDF 조합만이 디폴트옵션의 주요 상품으로 인식되는 기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위험성향뿐 아니라 연령과 납입방법 등 기준을 다양화한 구성상품들을 넣어서 상품군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사업자들은 디폴트옵션 상품이나 포트폴리오를 쉽게 조정(변경)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개선해 달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지금은 사업자들이 포트폴리오 내 구성 상품을 바꾸려면 고용노동부의 승인과 근로자 대표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경제 상황이나 수익률 추이를 봐가면서 금융사가 상품의 운용 전략에 변화를 주고자 할 때 이를 즉시 반영하게끔 해 달라는 주장이다.

김하종 한화자산운용 채널연금마케팅본부 이사는 "수익률 제고를 위해 금융회사가 포트폴리오나 상품을 바꾸려고 해도 절차가 복잡해 한계가 있다"며 "이런 허들은 결국 수익자인 가입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자산운용에 있어 융통성이 주어지면 좋을 것 같다"고 밝혔다.

하지만 제한된 환경 안에서 사업자와 당국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한계가 있다. 특히 적립금 340조원 규모의 퇴직연금 시장은 제도적 뒷받침 없이는 성장하기 어렵다. 결국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도의 결함을 메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즉 적격상품 유형에서 원리금 보장형을 빼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단 얘기다. 이는 제도를 바꿔야 하는 문제다. 이 방법이 어렵다면 미국처럼 사전지전운용 상품으로 원리금보장상품을 지정하는 경우 그 기간을 짧게 한정하는 조치라도 취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미국의 기업연금 디폴트옵션 적격상품(QDIA)은 투자결정 기간인 120일 동안만 원리금 보장형을 운용하게 했다.

근로자들이 제때 참고할 수 있도록 공시 체계를 보다 촘촘하게 설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남재우 연구위원은 "기존 퇴직연금 사업자의 경쟁이 가입자 유치 경쟁이었다면 이를 적격상품 효율성에 대한 운용경쟁으로 유도해야 한다"며 "공시 주기는 분기 단위 등 가능한 짧게, 수익률 산출 기간은 가능한 장기로 설정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끝)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