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미 쏠리드 대표는 국내 패션업계에서 ‘마스터(거장)’로 불린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패션의 존재감이 극히 미미했던 20여 년 전부터 그는 개척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2011년 한국인 최초로 에르메스, 루이비통, 디올 등 럭셔리 브랜드가 속한 파리의상조합 정회원 자격을 취득했다. 2020년 한국 브랜드 처음으로 프랑스 명품 백화점인 ‘르봉 마르셰’에서 남성관 매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또 한 번 역사를 쓴다. 26일(현지시간) ‘글로벌 명품 1번지’로 꼽히는 파리 생토노레 거리에 한국 브랜드로는 첫 매장을 연다. 24일 서울 구의동 본사에서 만난 우 대표는 그동안 겪어왔던 과정을 “지난했다”고 표현했다. 한국 디자이너로 지금의 토대를 만들어내기까지 수백, 수천 번 좌절감을 느꼈다는 얘기다.
▷2002년 ‘우영미 파리’를 파리패션위크에 선보인 지 21년 됐습니다.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파리에서의 첫 패션쇼를 잊지 못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국가에서 온 동양인 디자이너가 패션쇼를 한다는데 누가 와서 볼까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오전 10시30분, 좋지 않은 시간대에 관객석은 군데군데 비어 있었죠.
‘한국에도 하이패션(디자이너의 철학이 반영된 고급패션)이 있냐’는 말을 들으며 주눅이 들었고 열등감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패션쇼에 유명 패션지 ‘르 피가로’ 기자가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패션쇼가 끝나고 르 피가로에는 ‘코레앙 우영미, 그는 신인이 아니다. 지금 바로 매장을 열어라’는 평가가 실렸어요.”
▷지금의 입지를 생각해보면 열등감을 느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유럽의 역사와 전통에 경외감이 들었어요. 하지만 요즘엔 한국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올해 초와 하반기 파리패션위크에서 선보인 2023 가을·겨울(F/W), 2024 봄·여름(S/S) 우영미 컬렉션은 각각 경북 경주와 제주도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내년 2024 F/W 패션쇼에는 서울의 젊은이를 모티브로 기획합니다. 최근 ‘우영미 파리’ 대신 ‘우영미 서울’이란 로고를 티셔츠나 모자에 새기고 있는데 유럽인들이 열광하고 있죠.
20년 동안 해외에서 싸워봤더니 이제는 확신이 섰습니다. 한국은 자긍심을 가져도 됩니다. 한국인이 지닌 기본 자질과 빠른 속도, 좋은 취향이 결합하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한국이 국민 1인당 명품 소비 1위 국가로 조사됐지만 정작 한국엔 명품이라고 할 만한 브랜드가 많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지금 우영미 브랜드는 백화점 명품관에 들어가 있습니다. 치열하게 싸워 쟁취한 것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러지 않았어요. 해외 럭셔리 브랜드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틈만 나면 한국 브랜드의 매장을 빼거나 이동시켰죠. 그야말로 구박과 홀대를 받았습니다.
유통업체의 상품기획자(MD)도 해외와 국내로 나뉘어 있습니다. 명품관은 주로 해외 MD가 맡아요. 오죽하면 국적을 바꾸면 인정해주겠냐고 따지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나마 우영미 브랜드는 매출이 나오니 따질 힘이라도 있었던 것이죠.”
▷일본은 자국 디자이너를 보호하는 문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은 레이 가와쿠보(꼼데가르송), 이세이 미야케, 요지 야마모토라는 3대 디자이너가 패션산업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와 유통업체가 지원하고 국민은 이들을 아껴줍니다. 일본 내에서 3대 디자이너가 역량을 다져 해외에서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반면 한국은 패션 토양이 빈약한 게 사실입니다. 한국은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세계 무대에서 홀로 경쟁해야 합니다.”
▷대기업이나 자본과 손잡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무수한 유혹이 있었습니다. 국내 대기업도 많았고 중국은 셀 수도 없죠. 미국 독일 프랑스 홍콩 등에서 투자하겠다는 러브콜도 많았어요. 하지만 그들이 우영미 브랜드를 입양해 잘 키울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어요.
하이패션은 아이 키우듯 천천히 시간을 주며 성장을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본의 속성상 겨우 기기 시작한 아이를 뛰라고 요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언젠가 능력이 없어지면 누군가에게 넘겨야 할 테지만, 조건은 자식처럼 잘 키울 수 있는 곳이어야만 합니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