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칼럼] 한경협이 '레드카드' 안 받으려면

입력 2023-09-21 17:55
수정 2023-09-22 00:30
2016년 말. 당시 재계팀장이었던 기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임원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경련을 험악하게 ‘조진’ 기획기사 때문이었다. 내내 섭섭함과 분노가 뒤섞인 하소연이 이어졌다. 기자는 짧게 답했다. “무용론(無用論)과 해체론(解體論)이 나와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아닙니까. 그게 지금 전경련의 현실입니다.” 그 임원은 말문이 막힌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기억이 아직 선명하다. 류진 "이미 옐로카드 받은 상태"당시 전경련은 사면초가에 내몰린 상태였다. 박근혜 정부의 요구에 따라 주요 기업을 상대로 돈을 거둬 미르·K스포츠재단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수금 창구’ 역할을 했다는 비판이 쏟아지면서다. 여야와 진보·보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문을 닫으라”는 힐난이 터져 나왔다.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등 4대 그룹을 포함한 주요 회원사마저 등을 돌렸다.

어쩌다 그 지경이 됐던 걸까. 전경련은 시대적 변화를 읽지 못했다. ‘국민 경제 발전’이라는 정관상 목적은커녕 재계를 대표해 목소리를 내는 본연의 업무마저 소홀히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권력의 심부름꾼 역할에 만족해하며 스스로 매몰됐다. 그러는 사이 전경련 사무국은 관료화됐다. 회장(비상근)이 아닌 상근부회장이 조직을 좌지우지했다. 회원사가 아닌 사무국 주도 체제로 바뀌었다. ‘전경련을 위한 전경련’으로 변질한 것이다.

전경련의 ‘흑역사’를 7년 만에 다시 끄집어낸 이유가 있다.

지난 18일 한국경제인협회로 간판을 바꾸고 새 출발한 전경련의 혁신 조건들이 바로 그 부끄러운 역사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류진 신임 한경협 회장이 “간판과 이름은 바꾸지만, 축구로 보면 ‘옐로카드(경고)’를 받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다.

한경협이 국민과 회원사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한두 가지가 아닐 게다. 먼저 어두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잘못된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이른바 정경유착 근절이다. 반기업 정서 해소와 기업 위상 강화는 기본이다. 정부나 정치권, 노동권, 시민단체 등에 할 말도 해야 한다. 그게 진정한 ‘회원사 중심’의 싱크탱크다.

재계 ‘맏형’으로서 품위도 잃지 않아야 한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과 품격 있는 협력과 선의의 정책 경쟁을 해야 한다. 행사장에서 회장 자리나 발언 순서를 놓고 못난 기싸움을 벌이는 일은 그만둘 때다. '흑역사'에 새겨진 혁신 조건생존과 혁신을 위한 조건은 또 있다. 대통령과 관료, 여야 정치인의 인식 대전환이다. 기업과 경제단체를 ‘큰일’ 터지면 손 벌리는 ‘돈줄’로 여기면 안된다. 대기업 돈은 쌈짓돈이 아니다. 국내외 행사에 기업인을 동원하는 통로로 한경협을 활용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기업 총수들을 불러 정치인의 병풍으로 세우는 건 후진국에서나 하는 일이다.

그동안 한 번도 요구되지 않았던, 정부와 정치권의 반성과 인식의 대전환. 어쩌면 그게 ‘옐로카드’를 받은 한경협이 앞으로 ‘레드카드(퇴장)’를 받지 않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