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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성 디플레 탈출했나①에서 계속
일본 경제는 만성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했나. 최근의 물가만 놓고 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 보인다.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3.1%로 24개월 연속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높았다. 17개월 연속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물가목표인 2%를 웃돌았다. 3%를 넘은 것도 12개월째다.
일본은행이 여러 차례 올 하반기부터 물가가 꺾일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에너지와 신선식품 등 가격변동이 심한 품목을 제외한 근원 물가지수는 4.3%로 3.3%였던 6월보다 오히려 높아졌다. 42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슈퍼마켓 물가에서 확인한 대로 물가 항목의 60%를 차지하는 식료품 가격 상승이 주원인이다.
물가가 예상보다 치솟자 지난 7월 일본은행은 2023년 물가 전망치를 2.5%로 상향 조정했다. 4월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행은 올해 물가상승률을 1.8%로 예상했다.
디플레 탈출 여부를 물가로만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물가와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 단위 노동비용, 수급 갭의 네 가지 지표를 종합적으로 따진다. GDP디플레이터는 기업 물가를 포함한 종합적인 물가지수를 말한다.
단위 노동비용은 노동생산성과 임금이 물가에 얼마만큼 영향을 나타내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수급 갭은 일본 경제 전체의 잠재적인 공급 능력과 실제 수요의 차이를 나타낸다. 올해 1분기 까지는 단위 노동비용과 수급 갭이 '마이너스(-)'였다. 하지만 2분기 들어 단위 노동비용과 수급 갭도 '플러스(+)'로 전환했다.
일본 전문가들은 수급 갭이 2019년 3분기 이후 4년여 만에 플러스로 전환한데 특히 의미를 둔다. 일본의 생산 환경이 만성 수요 부족에서 공급 부족으로 바뀌면서 디플레를 벗어날 토대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물가와 임금이 상승하기 시작해 일본 경제가 디플레와의 싸움에서 전환점을 맞고 있다"면서도 "현 시점에서는 서비스 가격의 상승이 둔화하고 있어 디플레 탈출에 이르렀다고 볼 수는 없다"고 진단했다.
지난 8월29일 발표한 '2023년 경제재정백서'를 통해서다. 일본 정부가 발간하는 다양한 분야의 경제 백서 가운데서도 경제재정백서는 현재의 경제 상황을 총정리한 '백서의 최종본'으로 불린다.
물가가 17개월째 목표치를 넘었고, 디플레를 판단하는 지표 네 개가 모두 '디플레 탈출'을 가리키는데 일본 정부는 왜 '여전히 디플레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진단하는 걸까.
경제재정백서 외에도 일본 정부는 매월 일본의 경제 상황을 정리하는 '월례 경제보고'를 통해 디플레 여부를 판단한다. 일본 정부가 처음 디플레 진입을 공식 선언한 것도 22년 전인 2001년 3월 월례 경제보고를 통해서였다. 당시 일본 정부는 "일본 경제가 완만한 디플레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 진단은 다음달인 2001년 4월 일본은행이 양적 완화정책을 시작하는 근거가 됐다. 양적 완화가 효과를 발휘하면서 2006년 7월 월례 경제보고에는 "디플레 상황"이라는 문구가 빠졌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듬해인 2009년 11월 일본 정부는 두 번째로 디플레 선언을 했다.
가장 최근인 8월28일 발표한 월례 경제보고에서 일본 정부는 "디플레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인식을 넓게 형성시켜 디플레 탈출을 유도한다"라고 명시했다. '디플레에서 벗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디플레를 탈출한 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일본 정부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화법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실제로 디플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은행은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물가상승률이 안정적으로 2% 이상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시점까지 유지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핵심은 '안정적'이다. 2%를 잠시 넘어서는게 아니라 꾸준히 넘어야 금융완화 정책을 중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 정부 역시 디플레 탈출을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다시 그러한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는 상태"로 정의한다.
일본은행은 내년 물가가 1.9%, 2025년에는 1.5%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지난해와 올해는 국제 원자재값 급등 등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물가가 일시적으로 2%를 넘었지만 '안정적인 2%'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보는 이유다. 일본 정부가 제시한 '다시 그러한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는 것'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일본 정부가 디플레 탈출 여부에 대해 애매모호한 진단을 이어가는 두번째 이유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로 분석된다.
지난 20년 동안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경제가 살아날 만하면 성급한 재정 긴축과 금리 인상으로 장기 침체의 원인을 제공했다. 서민 경제가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서 성급하게 디플레 탈출을 선언했다가 또다시 성장의 불씨를 꺼뜨릴 우려가 있다는게 일본 정부의 진단이다.
4월28일 기자회견에서 우에다 총재가 "금융긴축(출구전략)이 늦어져 물가상승률이 계속해서 2%를 초과하는 리스크보다 성급한 금융긴축으로 2% 물가목표를 실현하지 못하는 리스크가 더 크다"라고 말한 이유다. 일본, 만성 디플레 탈출했나③으로 이어집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