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한·미 동맹에 준하는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사우디 등과 함께 이란의 핵 문제를 비롯한 중동의 핵심 현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중동 내 영향력이 커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다시 중동 지역에 적극 개입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상대 공격받으면 군사 지원 약속”뉴욕타임스(NYT)는 19일(현지시간) 미국 관리들을 인용해 미국과 사우디가 한·미 또는 미·일 간 군사동맹에 버금가는 상호방위조약을 맺는 방안을 협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미국과 사우디가 한·미 동맹 수준의 방위조약을 체결하면 유사시 상호 간 군사적 지원을 하게 된다.
NYT는 “양국의 군사협력은 사우디와 이스라엘 간 관계 정상화를 지원하려는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정책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로이터통신은 “사우디와 이스라엘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내년 대선에서 승리하려는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적 승리로 남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동안 사우디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대가로 미국에 방위조약 체결과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우라늄 농축 허용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2018년 사우디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암살당한 뒤 양국 관계는 틀어졌다. 바이든 행정부가 카슈끄지의 암살 배후로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를 지목하면서다. 바이든 행정부가 2021년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결정한 뒤엔 사우디뿐 아니라 전체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약화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중국은 올해 초 사우디와 이란 간 외교 관계 복원의 중재자로 나섰다. 러시아는 사우디와 원유 감산 보조를 맞추면서 중동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했다.
이에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중동 지역에 적극 관여하는 형태로 방향을 틀었다. 지난 5월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이어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사우디를 방문해 빈살만 왕세자를 만났다. 이달 초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선 중국의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에 맞서기 위해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MEC)’ 구상을 선보였다. ○사우디와 이란 핵무기 문제 논의미국은 사우디 등과 민감한 현안도 본격 논의하기 시작했다. 블링컨 장관은 이날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 참석해 파이살 빈 파르한 알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외교장관과 압둘라 빈 자이드 알 나하얀 아랍에미리트(UAE) 외교장관을 만났다. 이들은 예멘 내전을 가급적 신속하게 종식하고 예멘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전날 블링컨 장관은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 외교장관들과 회동했다. GCC는 사우디, 쿠웨이트, UAE, 카타르, 오만, 바레인 등 6개국의 지역협력기구다. 이들은 국방을 비롯한 역내 현안에 대한 집단 대응방안을 모색했다. 또 이란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조사에 협력하라고 촉구했다.
다만 미국은 이란의 변화를 주문하면서 이전과 달리 이란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앞서 17일 미국은 한국에 묶여 있던 이란 자금을 풀어주고 이란과 수감자를 맞교환했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미국인 수감자 석방은 온전히 인도주의적 행동이며, 미래에 다른 인도적 행동의 기반이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도 이란 관련 현안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NYT는 “이란이 러시아에 드론을 판매하고 국민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내용을 바이든 대통령이 거론하지 않은 것은 이란과의 긴장관계를 완화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