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여덟 개의 산과 바다가 있대. 그 중심엔 가장 커다란 수미산이 있지. 누가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까? 여덟 개의 산과 바다를 여행한 자와 수미산에 오른 사람 중에 말이야.”
이탈리아 북부 몬테로사의 허름한 산장. 이십년지기 피에르토와 브루노가 술잔을 기울이며 말한다. 얼큰하게 취한 30대 사내들의 실없는 소리가 아니다. 147분의 러닝타임 동안 두 인물의 삶을 지켜본 관객한테 인생의 선택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장면이다.
20일 개봉하는 ‘여덟 개의 산’은 산에서 처음 친구가 되고, 몇십년 후 산에서 다시 만난 두 남자의 우정을 다룬다. 이탈리아 최고 권위 문학상인 스트레가상을 받은 파올로 코녜티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지금도 해발 2000m 산장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는 작가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았다. 벨기에 출신 부부 감독 펠릭스 반 그뢰닝엔과 샤를로트 반더미르히가 이를 스크린에 옮겼다. 제75회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두 인물의 ‘브로맨스’(남자들의 우정)다. 도시 출신 피에르토는 열한 살의 여름에 방문한 알프스 산마을에서 유일한 또래 브루노를 만난다. 두 사람은 여름마다 산과 초원, 호수를 누비며 순수한 추억을 나누지만 결국 다시 보기 어려워진다. 피에르토는 아버지와 떠난 여행에서 고산병을 겪고 산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다. 여기에 철없는 불만까지 쌓이면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며 산을 떠난다. 같은 시간 브루노의 집안 어른들도 그를 공부시키기 위해 도시에 보내려고 한다.
그 후로 20여 년이 흘러서야 피에르토가 알프스를 다시 찾았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접한 뒤였다. 피에르토가 아버지 그리고 친구 브루노와 함께 시간을 보낸 산장 ‘바르마 드롤라’는 폐허로 변한 모습이다. 여기서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브루노와 재회한다. 그는 산사람으로 살며 묵묵히 이곳을 지켜온 터였다.
두 친구는 산장을 다시 짓는다. 벽돌이 하나씩 쌓이며 아버지에 대한 앙금이 정리되고, 친구 사이 우정이 재건된다. 산장이 다시 제 모습을 갖출 무렵 피에르토는 세상을 유랑하기로 결심한다. ‘여덟 개의 산’을 여행한 뒤 산장에 있을 브루노와 다시 만날 날을 기원하면서.
‘여덟 개의 산’을 경험한 피에르토와 하나의 산에 뿌리 내린 브루노. 영화는 두 사람의 삶 중 정답을 속단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의 선택에 대가를 치르는 모습을 비출 뿐이다. 피에르토는 아버지에 대한 뒤늦은 후회에 사로잡히고, 브루노는 산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다가 가족을 잃는다.
영화는 알프스의 탁 트인 자연을 비추지만 답답한 여운을 남긴다. 수많은 갈림길로 이뤄진 등산로처럼, 오르막과 내리막이 교차하는 인생사를 함축해 놓은 웰메이드 영화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