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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 요인이 세계 경제를 좌우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비용과 수익성 차원에서 투자를 결정했던 과거와 달리 국제 정세에 따라 외국인직접투자(FDI) 자금이 한쪽으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 경제보다 국가 안보를 우선시하게 되면 비효율성이 초래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블룸버그는 글로벌 기업의 투자 흐름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1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투자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개발도상국에 투자하던 과거와 달리 자국의 우방국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용 절감, 수익성 개선 등의 경제적 요인보다 국제 정세가 투자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올 들어 S&P500 편입 기업의 실적발표회에서 '지정학적' 요인에 대한 언급 횟수는 1만 2000회에 달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인 2021년에 비해 3배 이상 증가했다. 블랙록 등 미 월가 투자은행을 비롯해 코카콜라, 테슬라 등도 지정학적 요인에 따라 경영 전략을 수정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규탄 여부에 따라 우방국이 갈렸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해 9월 유엔 총회에선 러시아를 규탄하는 결의안이 회부됐다. 이 투표에서 반(反)러시아 세력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유럽연합(EU)과 일본, 한국 등은 규탄에 찬성표를 던졌고, 중국,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러시아를 옹호하는 입장을 내비쳤다.
지정학적 경계가 명확해지자 외국인직접투자(FDI) 흐름이 바뀌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해 1조 2000억달러 규모의 그린필드 FDI 중 1800억달러가 러시아를 옹호하는 국가에서 러시아를 규탄한 국가로 옮겨갔다. 그린필드 FDI는 외국 자본이 투자 대상국의 토지를 직접 매입해 해당 국가에 공장을 짓는 것을 뜻한다.
각국의 보조금 경쟁도 이 흐름이 확산하는 것을 촉진했다. 미국, EU 등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신규 투자를 하는 기업에 대한 보조금을 확대했다. 우방국에 대한 인센티브도 늘렸다. 때문에 서방국가와 우방국들은 공급망을 공유하는 '프렌드 쇼어링'을 추진했다.
반면 세계 그린필드 FDI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0~2019년 평균 11%에서 지난해 2% 미만으로 줄었다. 러시아에 대한 FDI 비중은 0%로 수렴했다. 같은 기간 미국의 그린필드 FDI 비중은 10년 내 최대치를 기록했다. 주요 7개국(G7) 모두 동반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경제 호황을 이끌었던 미국과 중국의 공조도 무너졌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0년 2분기부터 올해 1분기까지 미국 기업의 대(對)중국 투자는 57.9% 감소했다. 유럽 기업의 경우 이 기간 36.7% 줄었다. 미국과 유럽이 중국 경제에서 이탈하자 중국 외 아시아 국가들도 투자 금액을 60%가량 축소했다.
사실상 탈(脫)세계화가 시작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올해 초 "세계 경제가 경쟁적으로 분열하고 있다"며 "각 블록은 나머지 세계를 포섭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고 밝힌 바 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탈세계화로 무역이 둔화하면 세계 국내총생산(GDP)이 최대 7% 감소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부터 분열 양상이 나타났다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 규탄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국가가 차지하는 그린필드 FDI 비중은 2019년까지 15%로 감소했다. 지난 10년 평균값인 30%에서 반토막 난 것이다. IMF에 따르면 지난 70년간 FDI를 결정지은 요소 중 비중이 가장 큰 것은 '지정학적 요인'으로 나타났다.
IMF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역임한 모리스 옵스펠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역사적으로 투자의 흐름이 자유시장 경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절대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페니 골드버그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지정학적 요인을 '인위적인 불확실성'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시장의 흐름을 바꾸는 요소 중 하나라는 설명이다.
문제는 국가 안보를 우선시하게 되면 시장 경제의 효율성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이다. 지정학적 요소를 고려한 투자는 국가와 국제 질서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결정된다. 소수 집단의 이익이 늘어나도 세계적인 관점에서는 불이익이 초래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골드버그 이코노미스트는 "지정학적 요인에 따라 투자를 결정하면 제조 비용 상승으로 세계 인플레이션이 확산하고, 국가 간 협력이 축소돼 혁신 속도가 줄어든다"며 "또 빈곤국에 대한 투자는 등한시되며 이는 세계 경제의 불평등을 초래할 뿐이다"라고 비판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