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연 칼럼] K를 떼야 K팝이 산다

입력 2023-09-18 18:00
수정 2023-09-19 00:23
방시혁 하이브 이사회 의장은 지난해부터 1년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 머물고 있다. 요즘 들어선 거의 살다시피 한다. 하이브가 글로벌 음반사인 유니버설뮤직그룹과 손잡고 설립한 합작사 ‘하이브×게펜 레코드’가 선보이는 글로벌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하기 위해서다. 그를 몰아세우는 것은 등골 서늘한 위기감이다. 방 의장은 지난 3월 관훈포럼에서 “지금의 성취에 안주하면 한순간에 도태할 것”이라며 K팝 위기론을 처음으로 공론화했다.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 10개 중 7개가 BTS,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스트레이키즈, 트와이스 등 K팝 가수의 것이었다. 이런 호황을 타고 지난해 우리나라의 음반 수출액은 2억3311만달러(약 3100억원)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파행 운영으로 국가 망신 사태를 초래할 뻔한 잼버리 행사의 피날레는 K팝의 위상과 영향력을 다시금 확인한 자리였다. BTS로 인한 국가 브랜드 가치 상승과 경제적 낙수 효과는 올림픽 개최보다 크다는 분석도 있다. 그만큼 K팝은 압도적 영향력을 가진 국가 전략산업이다.

이처럼 화려한 K팝의 성공 이면에서 위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 대중음악 지표인 빌보드 핫100 차트에 K팝 아티스트가 진입한 횟수는 지난해 26회로 전년 대비 53% 급감했다. 한류의 보루로 여겨지는 동남아시아 주요국에 대한 음반 수출은 지난해 전년 대비 30%가량 줄었다. 베트남을 제외한 대부분 국가에 대한 수출이 감소한 가운데 인도네시아에선 60% 넘는 추락세를 보였다. K팝 경쟁력의 핵심인 아이돌 육성 시스템을 모방한 그룹이 세계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것은 위협적이다. BTS의 뒤를 이을 확실한 차세대 글로벌 스타가 보이지 않는 점도 우려스럽다.

국내 엔터 업계의 승부수는 ‘현지화’다. 방 의장은 K팝 시스템의 미국 본토 이식을 시도하고 있다. K팝만의 독창적 아티스트 재목 발굴부터 육성, 데뷔까지의 시스템과 성공 노하우를 세계 최대 미국 시장에 이식하는 것이 목표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같은 기업이 국내에서 축적한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북미에 현지 생산기지를 세워 글로벌 경쟁자와 전면전에 나서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JYP엔터테인먼트도 올해 일본과 중국, 미국에서 멤버 전원을 현지인으로 구성한 아이돌그룹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수만 전 SM엔터테인먼트 총괄프로듀서는 이를 ‘한류 3단계 진화론’으로 설명한 바 있다. 한국 가수와 음반을 해외에 수출하는 것이 1단계라면, 2단계는 해외 멤버를 영입해 다국적 팀으로 공략하는 것이다. 현지 자본과 손잡고 현지에서 아티스트를 발굴, 육성하는 시도는 3단계에 해당한다.

K팝이 세계의 주류에 올라섰다는 평가는 섣부르다. 국내 K팝 회사를 모두 모아봤자 글로벌 음반·음원 시장 점유율이 2% 미만(매출 기준)에 불과하다. 국내에선 공룡으로 취급받는 하이브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매출 비중은 고작 0.9%다. 유니버설뮤직, 소니뮤직, 워너뮤직 등 글로벌 3사가 67.4%로 시장을 과점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고래 사이에 낀 새우 신세를 면치 못하는 현실이다.

K팝 산업은 기로에 섰다. K팝에서 K를 떼어내야 한 단계 도약이 가능하다는 지적은 시사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지 멤버로 구성된 그룹이 현지 언어로 부르는 노래가 과연 K팝이냐’는 정체성 논란은 소모적일 뿐이다. 지속 가능한 장르이자 산업으로 진화하지 못하면 1990년대 일본 J팝처럼 ‘반짝 신드롬’으로 끝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