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멸종 위기에 내몰렸던 순정 내비게이션(내비)이 부활하고 있다. 자동차가 ‘달리는 전자제품’으로 탈바꿈하면서 생긴 일이다. T맵이나 카카오내비 등 스마트폰 기반 내비만으론 전장 부품을 정교하게 조작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순정 내비가 장착된 차량 수요가 부쩍 늘었다는 설명이다.
18일 시스템통합(SI)업계 등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현대자동차·기아의 순정 내비 장착률이 글로벌 기준 50%를 넘겼다. 3년 사이 장착률이 20%포인트 가까이 높아졌다. 유럽에서 내년부터 출시되는 모든 신차에 내비와 연동된 지능형속도제한시스템(ISA)이 의무화된 것이 전체 장착률 상승을 이끌었다.
내비는 차량 이동 경로를 탐색하는 소프트웨어(SW)다. 현대차·기아에 장착되는 순정 내비는 현대차그룹 SI 전문 계열사 현대오토에버(대표 서정식)가 생산한다. 이 회사는 내비를 포함해 현대차그룹의 차량용 SW 개발과 디지털 인프라 구축 전반을 책임진다.
현대차는 2013년부터 순정 내비 장착 차량을 출고했다. 초기 순정 내비는 인기가 없었다. 도로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데다 사용자 인터페이스(UI)도 불편했다. SK텔레콤의 T맵이나 카카오가 스타트업 록앤올(서비스명 김기사)을 인수해 발전시킨 카카오내비 등이 시장을 주도한 배경이다.
현대오토에버는 2021년 4월 현대엠엔소프트, 현대오트론을 흡수 합병하며 관련 인력과 기술을 대폭 강화했다. 차량 통신 성능과 위성항법장치(GPS) 수신율 등이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차량 출고 옵션으로 똑똑해진 순정 내비를 선택하는 사용자가 증가세로 돌아섰다. 현대오토에버 관계자는 “완성차 사양이 점차 고급화되고 내비 등 차량용 SW의 평균 판매가격(ASP)이 오르면서 수익성이 좋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내비 장착률이 올라가면서 현대오토에버 실적은 대폭 상승했다. 2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7539억원, 527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19.6%, 83.4% 증가했다. 증권가에서는 현대오토에버가 올해 매출 3조1090억원, 영업이익 1960억원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0년 4월 창사 이후 최대 실적이다.
순정 내비는 자율주행시대 핵심이기도 하다. 자율주행은 먼저 차량의 위치를 정밀하게 확인하고, 카메라 등으로 주변을 추가로 인식한 뒤, 도로 상황 및 주행 코스에 맞게 차량을 제어하는 순서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현대오토에버는 순정 내비의 효율을 높일 고정밀(HD) 지도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구글, 네이버 등이 제공하는 지도는 도로망 정도가 보이는 표준(SD) 지도다. 오차 범위가 1m 이상이다. 이에 기반한 내비는 도로 위 차량의 대략적인 위치를 표현한다. 반면 HD 지도는 10㎝ 오차 범위 수준으로 정보를 제공한다. 차량이 어느 차선에 있는지까지 인식한다. 현대오토에버는 순정 내비용으로 국내뿐 아니라 세계 도로망에 맞는 HD 지도를 제작하고 있다.
하드웨어(HW) 부품을 제어하는 SW 기술을 다수 확보한 것도 현대오토에버의 장점이다. 핸들 조향, 차량 간 통신, 전·후·측방 카메라부터 차량 내 음성 인식까지 포함한다. 일부 파편화된 기술을 갖고 있을 뿐인 다른 정보기술(IT) 기업이나 자동차 부품사들과 결이 다르다.
김진원 기자 jin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