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 '귀농' 택한 유학파 작가가 30년 매달려 그린 '이끼와 남자'

입력 2023-09-17 17:38
수정 2023-09-18 09:51


예술은 기존 상식을 깨뜨리는 그 무엇인가. 심오한 메시지가 담긴 사유의 정수인가. 아니면 예술가로 이름난 사람들이 만든 것인가. 저마다 예술의 정의에 대해 내놓는 답은 다르지만, 쉽게 공감할 만한 답이 하나 있다. 바로 ‘보기 좋고 아름다운 것’이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임동식(78)이 바로 그런 답을 추구하는 예술가다. 별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 그 밑에 푸른빛을 머금은 토끼풀. 가로 2.2m, 세로 1.8m의 널찍한 캔버스에 담아낸 시골 밤 풍경은 서정적이고 환상적이다.



임 화백은 30여 년 전 독일에서 ‘잘나가던’ 예술가였다. 홍익대 미대 회화과를 거쳐 독일로 건너가 함부르크 미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가 자연과 예술의 관계를 탐구하려고 만든 야외현장미술연구회 ‘야투’(들로 던진다)의 전시는 현지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그는 1990년 돌연 귀국해 충남 공주 원골마을로 향했다. 해외에서 주목받던 예술가가 인적 드문 시골로 들어간 이유는 ‘예술과 자연은 하나’라는 자신의 철학을 몸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예즉농 농즉예(藝卽農 農卽藝).’ 임 화백에게 농부의 삶은 곧 ‘자연과 생명을 다루는 예술’이었다. 그래서 그는 직접 나무와 돌을 구해 자신이 살 집을 짓고, 주변에 호박과 꽃을 심었다. 농촌의 일상적인 행위는 퍼포먼스 예술이 됐고, 그 작업을 그림으로 옮겼다. 이런 작업으로 그는 ‘자연예술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번 개인전의 제목이자 대표작인 ‘이끼를 들어올리는 사람’은 임 화백이 약 30년간 붙들고 그린 작품이다. 1991년 여름 금강에서 이끼를 들어올리는 퍼포먼스를 했던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그에게 이끼는 태초의 자연과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체였다.

특이한 점은 임 화백이 이 그림을 세 번 고쳐 그렸다는 것이다. 1993년 처음 그림을 그릴 땐 옷을 입은 채 이끼를 들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그러다 2004년, 문득 ‘옷을 벗고 있는 나체 상태가 원초적 자연에 더 가깝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옷을 지우고 나체로 다시 그린 이유다.



2020년엔 디테일, 색감 등을 고쳐 작품을 완성했다. 세필로 그려낸 이끼와 남자는 수십 년간 자연과 예술의 관계를 고찰해온 그의 인생을 한 번에 보여주는 듯하다. 전시는 10월 1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