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퇴직연금 자동가입으로 국민연금 부담 줄였다"

입력 2023-09-26 15:32
수정 2023-09-26 15:37
"영국도 한국처럼 인구 고령화로 국민연금(nSP)의 부담이 커지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그 대책으로 '퇴직연금 자동가입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영국 퇴직연금 수탁 사업자인 AON의 매튜 아렌즈 영국연금정책본부장(사진)은 최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렌즈 본부장은 "과거 영국도 한국처럼 인구 고령화로 노동인구가 감소했고, 이로 인해 줄어드는 nSP 납입액을 세금으로 충당할지 결정해야 했다"며 "영국은 이런 충당 없이 '부과방식(pay as you go)'으로 nSP를 운영하기로 했고, 그 보완책으로 2012년 퇴직연금 제동가입 제도를 실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AON은 런던에 본부가 있는 세계 2위 재보험 회사다. 영국에서는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이 퇴직연금 수탁 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고 AON도 그렇다. 아렌즈 본부장은 연금과 관련해 20년 넘게 기업 컨설팅을 해 온 이 분야 베테랑이다.

부과방식 연금은 납입자에게 받은 돈을 짧은 시간 내에 바로 수급자에게 주는 것을 말한다. 이 방식은 적립금이 거의 없는 '고갈 상태'로 운영된다. 영국 nSP는 계정에 보관하는 기금 규모가 2개월 지급분에 불과한 부과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 수십년 뒤 국민연금이 고갈되면 제도가 어떻게 변할지 영국을 통해 미리 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렌즈 본부장은 "영국 정부가 퇴직연금 자동가입 제도를 도입한 건 nSP의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며 "이 제도로 인해 퇴직연금 가입률은 90%에 가까운 수준까지 올라갔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퇴직연금에 가입할 가능성은 낮지만, 일단 자동가입되면 굳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탈퇴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방법으로 nSP에 대한 사람들의 의존도를 일부 줄일 수 있었다"고 했다.

영국의 퇴직연금은 수탁사 내에 있는 별도의 기금운용위원회가 자기 책임 하에 투자를 하고 그 성과를 시장에서 평가 받는 '기금형'이 65%(2021년 가입자 수 기준)다. 우리나라의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은 수탁사가 계좌만 제공하고 투자자가 직접 또는 디폴트옵션에 따라 펀드를 선택하는 '계약형'이 대부분이다. 아렌즈 본부장은 "기금형의 장점 중 하나는 운용위가 투자자의 이익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라며 "수탁사와 투자자의 이익 충돌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했다.

아렌즈 본부장은 "최근 수십년에 걸친 런던의 집값 상승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영국에도 큰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세대는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 세대가 집을 산 뒤 오랜 기간에 걸쳐 그 가격이 많이 오르는 걸 봤고, 이 때문에 영국의 젊은층 다수는 현재 집 소유를 열망하고 있다"며 "하지만 젊은층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집값이 올라 소유 대신 임차로 만족해야 했고, 최근 금리 인상으로 이런 흐름이 더 굳어졌다"고 했다.

설령 집을 살 수 없어도 연금 투자를 잘 하면 얻을 수 있는 게 많다고 아렌즈 본부장은 조언했다. 연금은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해 투자자가 자산가격 조정에 따른 위험(리스크)을 분산시킬 수 있도록 해주고, 절세 혜택도 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임대수익을 올리는 런던 집주인에 대해서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높은 세금, 까다로운 시설 규제 등을 부과하는 추세"라는 게 아렌즈 본부장의 전언이다. "부동산 가격이 조정을 받으면 금융 부실이 생길 수 있다"며 규제를 도입하지 않으려고 하는 한국 정부와 다르다.

아렌즈 본부장은 "연금을 활용해 채권 등 안전자산보다는 주식에 투자하는 게 좋다"고 권했다. 그는 "유동성과 효율성이 높은 시장의 주식에 장기 투자했을 때 채권보다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여러 경제학자들이 연구로 입증했다"며 "글로벌 주식은 장기 연금 투자에 적합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런던=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