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서 1인당 국민연금 수령액이 가장 많은 지방자치단체는 어디일까. 놀랍게도 부동의 선두는 자동차, 조선, 정유 등 핵심 제조업 시설이 밀집한 울산이 차지하고 있다. 부촌의 상징인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구)도 울산에는 미치지 못한다.
울산에 연금 부자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결은 국민연금 '가입 기간'에 있다. 대체로 정년이 보장되는 제조업 특성 상 '더 오래' 일한 것이 고(高)연금의 비결이다. ○톱10에 울산 4구 모두 들어
10일 국민연금공단의 '시군구별 1인당 월지급액 평균' 자료에 따르면 최신 통계인 지난 5월 기준 국민연금(노령·장애·유족연금 포함) 평균 수급액이 가장 많은 곳은 울산 동구로, 1인당 월 88만4532원이다. 이는 전국 평균 56만3679원보다 약 32만원(57%)이 많은 수치다. 울산 동구에는 국내 1위 조선업체인 HD현대중공업이 자리잡고 있다.
동구 뿐 아니라 울산의 다른 구들도 연금액 '톱10'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2위는 현대자동차가 있는 울산 북구로 1인당 평균 81만9960원의 월수급액을 기록했다.
SK이노베이션, 금호석유화학, 코오롱인더스트리 등 화학 회사들이 밀집한 울산 남구는 72만9342원으로 6위, 울산의 도심 지역인 중구는 69만2377원으로 9위에 올랐다. 상위 10개 지자체 가운데 4곳을 울산이 휩쓴 것이다.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이 있는 조선업 '메카' 경남 거제시도 72만8936원)으로 7위를 기록했다. 상위 10곳 중 절반을 국내 주요 제조업 단지들이 채웠다.
3위는 경기도 과천시로 1인당 월평균 79만6789원의 국민연금을 받고 있다. 강남 3구로 불리는 서울 강남구(79만215원)와 서초구(78만5039원)가 각각 4위와 5위, 송파구(70만7천339원)가 8위로 뒤를 이었다. KAIST, 충남대 등 대학과 정부와 기업의 연구소들이 밀집한 대전 유성구(67만6712원)가 10위로 '탑10'에 이름을 올렸다.
17개 시·도별 통계에서도 울산은 1인당 월평균 74만5936원으로 1위였다. 세종(60만3823원), 서울(60만2580원), 경기(58만9942원), 인천(57만610원) 순으로 뒤를 이었다. 가장 수급액이 적은 곳은 전남(48만3025원)으로, 울산과는 26만원 이상 차이가 났다. ○'중소득 장기가입'이 연금 부자 비결연금 부자가 제조업 메카에 유독 많은 이유는 '근로 소득'에 대해서만 보험료과 부과되고, 가입 기간이 길수록 소득 보장 수준이 높아지는 국민연금 제도의 특성 때문으로 추정된다.
현재 국민연금은 일하는 40년 동안 월 소득의 9%를 내면 은퇴 후엔 일할 때 벌던 평균 소득의 40%를 연금으로 주는 구조다. 소득이 많다고 그만큼 매기는 것은 아니다. 올해 기준으로 보면 월 37만원에서 590만원까지의 근로소득에 대해서만 보험료가 부과된다. 수억원 이상의 고액 연봉을 받거나, 주식 투자로 큰 돈을 버는 사람과 월 590만원의 소득을 가진 근로소득자 사이엔 연금 납부액과 수급액의 차이가 거의 없는 셈이다.
가입 기간이 길수록 급여액이 높아지는 것도 국민연금의 특징이다. 국민연금은 가입자가 40년 간 보험료를 납부했을 때 명목 소득대체율 40%를 보장한다. 이보다 가입 기간이 짧으면 소득대체율은 그만큼 떨어진다. 현재 실질소득대체율은 20%중반대로 추정된다. 2020년 기준 가입자들의 평균 가입기간은 18.6년, 실질 소득대체율은 24.2%였다.
울산, 거제 등 제조업 중심지에 연금 부자들이 많은 이유는 이 지역에 월 500만원 이상의 급여를 받고 근속 기간이 긴 임금 근로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자동차, 조선, 화학 등 중공업 계열 대기업의 생산직 근로자들은 60세 정년을 채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학 졸업 후 일러야 20대 중후반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은 사무직과 달리 20대 초반부터 취업해 일하는 경우가 많아 근속 기간이 40년에 가깝다. 대기업에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 업체들 또한 장기 근속자들이 많다. 국민연금 수령액에 있어선 '중소득 장기가입자'가 어느 고소득자 못지 않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셈이다. ○"가입 기간 늘려 실질 소득대체율 높여야"최근 한창 진행 중인 연금개혁 논의에서도 이 같은 특성은 논의의 쟁점이 되고 있다. 국민연금의 노후 보장 수준을 높일 것을 강조하는 '노후소득보장파'는 현행 40%인 명목 소득대체율을 50%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국민연금의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재정안정파'는 명목 소득대체율을 높이기보단 가입자들의 근로 기간을 늘리고 출산, 군복무 시 가입기간을 추가 인정해주는 크레딧 제도 등을 활용해 현재 20%중반대에 불과한 실질소득대체율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최근 윤석열 정부의 연금개혁에 밑바탕이 될 제도 개편안을 제시한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는 후자에 무게를 둔 노후소득보장 방안을 제시했다. 현행 40%인 소득대체율은 유지하되 보험료율을 12~18%로 올리고 만 65세인 연금 지급개시연령을 68세로 늦추는 '더 내고 늦게 받는'안이다.
대신 재정계산위는 현재 만 59세인 국민연금 가입상한연령을 지급개시 시점이 늦어지는 것에 맞춰 높이고, 크레딧 제도를 대폭 강화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더해 고령자가 최대한 오랫동안 일할 수 있도록 노동 시장 개선 작업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