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은 작은 연극"…'전설의 삽화가'를 캔버스로 캐스팅하다

입력 2023-09-07 18:25
수정 2023-09-08 02:36

1925년 창간한 미국 잡지 ‘뉴요커’는 대공황을 거치며 지성인들의 열광적 지지를 얻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수전 손태그, 해나 아렌트 같은 지성인들의 기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류층 사회를 겨냥한 풍자 가득한 삽화와 한 줄짜리 지문, 그 자체로 작품이 된 표지의 일러스트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걸 그린 이가 ‘전설의 삽화가’로 불리는 피터 아르노(1904~1968)다. 뉴요커 창간호부터 죽기 전까지 101개를 그렸다.


100년 전 ‘한 장의 이미지’로 모든 것을 말한 그를 21세기에 소환한 작가가 있다. 미국 화가 데이비드 살레(71)다. 그는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에 퍼진 2020년부터 아르노의 삽화를 차용해 ‘Tree of life(생명의 나무)’ 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했다.

4일 서울 한남동 리만머핀에서 14점의 신작을 들고 개인전 ‘월드 피플’을 연 살레는 “인간의 삶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장면들이 있고, 그렇기에 인생이 얼마나 멋지고 재미있는지를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아르노가 사회 풍자적 메시지를 던진 것처럼, 살레의 작품엔 의도적인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언뜻 보면 밝고 활기차고 역동적인 그림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가 불안하고 복잡하다. 화면의 한가운데엔 주로 나무가 수직으로 자리잡아 등장인물들을 따로 떼어놓는다. 기둥을 중심으로 좌우엔 서로 다른 사건이나 상반되는 인물들의 표정이 연출된다. 이 시리즈의 가장 독특한 부분은 하단 3분의 1에 있다. 초기작에선 나무뿌리가 있었고, 최근엔 추상적 이미지나 다양한 색채가 배치됐다. 살레는 “캔버스의 상단엔 어떤 동작과 코미디적 요소를 두고, 하단엔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했다.

작가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두고 “나는 작은 연극 무대를 연출한다”고 했다. 이해가 쉬울 것 같은 그림인데, 구체적인 서사를 명확히 읽어낼 수 없는 모호함이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그는 또 “피터 아르노는 신이 내려준 것처럼 나에게 왔다”고 했다.

살레는 20대 때부터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벌여 34세가 되던 1987년 뉴욕 휘트니미술관 사상 최초로 최연소 중견작가 회고전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오스트리아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구겐하임 등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전시는 10월 28일까지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