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끼리 죽고 죽이는 어둠의 5시간…그리스 비극에서 구원을 찾아나서다

입력 2023-09-05 18:56
수정 2023-09-06 00:24

연극 ‘이 불안한 집’(사진)의 분위기는 제목 그대로다. 어둡고 기괴한 불안감이 작품 전반을 지배한다. 살인, 그것도 가족 간 살인이 세 차례나 벌어지고 붉은 피와 날카로운 비명이 난무한다. 장장 다섯 시간에 걸쳐 이어지는 작품은 고대 그리스 비극이 원작이다. 2500년 전 이야기 ‘오레스테이아’를 현대적 관점에서 되살렸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흐릿한 경계 속에서 구원을 찾는다.

최근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이 연극은 2016년 영국에서 초연됐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랑하는 딸을 제물로 바친 아가멤논 왕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현지 평단과 관객 모두 호평했다. 영국 유력지 가디언은 “심도 있고 야심 차며 오싹한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라며 별 다섯 개를 줬다. 스코틀랜드 최대 언론 스코츠맨은 “21세기 선구자적 각색”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스타 극작가 지니 해리스가 각색한 이 공연이 한국 무대에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극단과 2017년 동아연극상을 받은 연출가 김정이 만났다. 연극은 기원전 458년 ‘비극의 아버지’ 아이스킬로스가 내놓은 작품과 비교해 여성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으로 그렸다.

아가멤논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죽이자 왕비 클리템네스트는 남편인 왕을 살해한다. 하지만 왕비도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의 또 다른 딸 엘렉트라가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엄마를 살해한 엘렉트라는 트라우마를 겪는다. 2500년 전 원작에서는 아들이 왕비를 죽이지만 ‘이 불안한 집’에서는 딸이 죽이는 것으로 바뀌었다.

작품의 현대적 각색은 마지막 3부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정신과 의사 오드리가 새롭게 등장해 엘렉트라를 진료한다. 비슷한 트라우마를 겪는 의사 오드리와 ‘모친 살해범’ 엘렉트라의 고통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극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이를 바라보는 관객마저 지치고 괴로울 정도로 극한의 고통을 연출한다. 반복되는 트라우마와 비극의 굴레가 절정을 이룬다.

극의 시작과 마무리에 등장하는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은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장함과 기괴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해준다. 3부에서 쓰이는 5악장의 대규모 합창은 앞서 쏟아진 비명과 고통을 위로하고 구원한다. 말러가 5악장을 두고 남긴 말이 이 연극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보라, 심판은 없다. 죄인도 없고 의인도 없다. 어떤 것도 위대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비천하지 않다. 징벌도 없으며 보상도 없다. 다만 압도적인 사랑만이 우리의 존재를 지극히 비출 뿐이다.”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1·2부와 현대 의학 및 병원이 등장하는 3부로 넘어가는 연결고리가 다소 약한 듯한 느낌은 지우기 어렵다. 하지만 연극 애호가라면 흔치 않은 다섯 시간의 대장정에 동참해볼 만하다. 극의 규모나 소재 등으로 봤을 때 국립극단이 아니라면 여러모로 도전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공연은 명동예술극장에서 오는 24일까지.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