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과 양초 하나, 그리고 압정 한 상자가 놓여있다. 이 세 물건을 이용해 양초를 벽에 고정하고 불을 밝혀야 한다. 단, 촛농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까? 해법의 핵심은 상자 속 압정을 밖으로 빼내는 것이다. 우선 상자 속에 담긴 압정을 바닥에 쏟아낸다. 다음으로 쏟아 낸 압정을 이용해 빈 상자를 벽에 고정한다. 마지막으로 상자 바닥에 양초를 세우고 불을 붙이면 된다. 압정을 상자 안에 그대로 둔 채 수수께끼를 풀 방법은 없다. 상자 밖으로 압정을 쏟아낸 사람만이 해결책에 도달할 수 있다.
일은 보편적으로 직무기술서라는 형태로 구조화된다. 직무기술서는 압정이 담긴 상자와 흡사하다. 직무를 구성하는 세부 과업과 직무수행에 필요한 요건을 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직무기술서가 인재를 최적으로 활용하는 기회를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머서의 트렌스포메이션 서비스부문 글로벌 리더인 라빈(Ravin Jesuthasan)은 일의 ‘파편화(Deconstruction)’와 ‘융합화(Reconstruction)’를 미래 조직운영에 필수요소라 강조한다. 파편화는 직무를 과업과 세부활동, 프로젝트와 같은 구성요소로 해체하는 것을 말한다. 직무뿐만 아니라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 역시 이들이 지닌 스킬로 해체하는 걸 포함한다. 융합화는 파편화한 직무의 세부 구성요소를 기존과는 다르게 재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우리는 촛불 붙이기 수수께끼와 비슷한 상황을 자주 마주할 것이다. 상자 속 압정을 밖으로 꺼내야 하는, 바로 그런 순간이다. 변화의 속도와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 일상화된 오늘날, 기업들에겐 보다 민첩한 움직임이 요구된다. 이에 새로운 시도-실패-학습을 빠르게 반복하는 조직운영이 경쟁우위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필요한 스킬을 가진 직원을 한곳에 모아 기민하게 대응하는 형태로, 구성원이 하나의 직무를 안정적으로 담당하는 인력운영에서 벗어나, 필요에 따라 여러 직무 영역을 넘나들며 수시로 다양한 프로젝트나 단기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이다. 일을 스킬 단위로 해체·재구성하고 필요한 스킬을 갖춘 인재를 레고블록처럼 조합한다. 압정이 든 상자를 압정과 빈 상자로 해체해야 원래보다 쓸모있는 상태로 재구성하듯, 일의 미래에 보다 애자일하게 대처하려면 직무를 해체하는 접근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흔히 직무가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가정은 인재관리를 공급 측면에서 접근하도록 만든다. 어떤 직무에 공석이 발생하면 그 직무를 대신 맡을 누군가를 조직 내에서 찾거나 전임자와 비슷한 경력을 갖춘 대체자를 외부에서 찾는 게 보편적이다. 해야 할 직무(수요)는 고정해두고 이 직무를 수행할 적합한 사람을 확보(공급)하는데 주력한다.
노동시장에 직무를 수행할 만한 사람이 충분하다면 공급 중심의 인재전략은 효과적이다. 적합한 인력을 시의적절하게 충원할 수 있다. 반면, 노동시장에 자격을 갖춘 잠재인력이 충분치 않은 경우에는 문제에 직면한다. 원하는 인재를 타이밍 맞게 확보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워진다. 인력부족 문제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같이 수요가 급증하는, 희소한 스킬을 요구하는 일자리에서 더욱 심각하다. 디지털 전환 가속화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인재 수요를 급증시킨다. 수요는 늘어나는데 공급은 부족하다 보니 기업들은 인재쟁탈전으로 내몰린다. 다급한 상황에 경쟁적으로 급여를 높이는 전략을 벗어나지 못한다. 최근 일어난 디지털 전문인력 영입을 위한 연봉인상 치킨게임은 이러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과 사람을 직무와 직무담당자로 바라보는 관점은 오랜 기간 인사운영의 기본 전제로 자리매김했다. 직무에 적합한 사람을 찾아 그 직무를 맡긴다는 접근은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최근의 업무환경을 돌아보면 직무 중심 인력운영이 유효하지 않은 상황을 종종 목격한다. 직무가 아닌 프로젝트 또는 단기과제에 맞춰 업무를 부여하는 상황이 빈번해지고 있다. 프로젝트나 단기과제 역시 수시로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새로운 업무방식은 직무가 고정되어 있다는 가정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다. 직무를 업무환경에 맞춰 해체하고 재구성할 때 보다 유연하고 민첩한 인력운영이 가능해진다.
직무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은 인재문제를 공급이 아닌 수요의 문제로 이동시킨다. "이 직무를 수행하는데 어떤 직원이 적합한가"는 인력의 공급차원에서 접근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수요 측면으로 바꿔보자. 직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비즈니스 전환 또는 새로운 업무환경에서 우리는 어떤 일과 스킬이 필요한가, 이러한 스킬에 대한 구성원들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 그랬을 때 직무를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해서 일을 부여해야 하는가”로 질문을 바꾸는 것이다.
미국의 A사는 대형마트와 온라인을 중심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소매유통기업이다. A사는 코로나 감염병으로 사업에 큰 변화를 마주했는데, 오프라인 매장을 찾는 고객은 급격히 줄어든 반면 온라인 매출과 전화주문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매장 내 상품계산과 재고관리를 담당하는 상당수 직원이 해고대상자로 내몰렸다. 한편 몰려드는 전화주문과 비대면 고객응대에 필요한 콜센터 직원을 확보하는데는 애를 먹었다.
인력수급 불균형 문제의 해법으로 A사는 공급이 아닌 수요 관점으로 접근한다. 매장 내 직무를 과업의 묶음으로, 그리고 구성원을 스킬의 묶음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관점의 전환 덕분에 하나의 직무에 묶여 있던 매장직원들은 정리해고 대신 새로운 일을 담당하게 된다. 하루의 전체 업무시간 중 일부는 기존처럼 매장 내에서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집에서 원격으로 콜센터 업무를 수행했다. 기존 직무체계에서 ‘홈 콜센터’ 직무라는 건 없다. 하지만 매장 직원들은 이 새로운 일에 필요한 대부분의 스킬을 이미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다. 상품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고객을 응대하는 스킬과 경험도 풍부하다.
유럽의 대형보험 B사는 디지털 기반으로 비즈니스 모델 변화를 꾀한다. 중개인 중심으로 보험을 판매하는 방식에서 소비자가 직접 보험상품을 고르는 디지털화를 추진한 것이다. 혁신 과정에서 다양한 프로젝트가 생겼고,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UX,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등 혁신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디지털 전문인력의 수요가 급증한다.
문제는 디지털 인력들이 전통적인 기능조직 속에서 정해진 직무만을 담당한다는 점이다. 이는 수시로 생기고 없어지는 프로젝트에 디지털 전문인력을 시의적절하게 투입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프로젝트 스태핑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B사는 모든 디지털 전문인력을 기존 조직에서 빼내어 별도의 ‘탤런트 클라우드(Talent Cloud)’를 구성한다. 탤런트 클라우드에 속한 인력들은 자신의 스킬을 최적으로 활용하는 프로젝트에 애자일하게 매칭되는데, 한 명이 동시에 여러 개 프로젝트에 투입되기도 한다. 인공지능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각 프로젝트에 필요한 스킬과 이러한 스킬을 보유한 인재를 최적으로 매칭시킨 결과다.
일의 미래와 새로운 일하는 방식은 그동안 우리가 당연시 여겨온 가정을 되돌아보게 한다. 직무와 직무담당자에 기반한 인력운영 방식에서 벗어나, 스킬을 중심으로 직무를 해체하고 구성원을 스킬의 묶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곧, ‘직무-사람’이라는 일대일(一對一) 조직운영을 ‘스킬-과업’의 다대다(多對多) 관계로 전환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김주수 MERCER Korea 부사장 / HR컨설팅 서비스 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