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만 해도 서울 주요 지역에서 전세금을 수억원 내려도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집주인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엔 기존보다 보증금을 올려 전세 갱신 계약을 맺는 사례가 속속 나오고 있다. 정부가 역전세(계약 당시보다 전셋값 하락) 대책을 내놓고 대출금리가 하락한 영향으로 서울 전셋값이 석 달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어서다. 시장에선 전세 매물도 감소하고 있어 당분간 임대인(집주인)에게 유리한 시장 환경이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경희궁자이 전세 2억원 ‘쑥’
30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서울 송파구 잠실동 잠실엘스 전용면적 84㎡는 이달 보증금 9억9000만원에 전세 갱신 계약이 이뤄졌다. 종전 계약(9억4500만원)에 비해 보증금이 4500만원 올랐다. 연초만 해도 전셋값을 낮춘 갱신 거래가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지난 1월엔 이 아파트 전용 84㎡가 기존 11억원에서 2억8000만원 깎은 8억2000만원에 갱신 계약이 이뤄지기도 했다.
강북 ‘대장주’로 꼽히는 종로구 홍파동 경희궁자이의 상황도 비슷하다. 보증금 7억원에 월세 50만원을 내고 이 단지 전용 84㎡에 거주하던 한 세입자는 이달 보증금은 올리지 않는 대신 월세를 기존의 두 배인 100만원을 내기로 하고 전세 계약을 갱신했다. 지난 2월 8억5000만원까지 떨어진 이 아파트의 신규 계약 전세보증금은 이달 10억5000만원으로 뛰었다. 강남구 대치동 래미안대치팰리스, 마포구 염리동 마포자이 등에서도 이달 들어 보증금이나 월세를 올려 재계약한 사례가 나타났다.
올초엔 집값 하락과 역전세난이 겹치며 전셋값이 뚝뚝 떨어졌다. 전셋값이 바닥을 찍었다는 판단에 전세 수요가 몰리며 5월 서울 전셋값이 반등했다. 금리 영향도 컸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의 전·월세전환율은 1월 4.5%에서 6월 4.8%까지 올랐다. 같은 기간 은행권의 전세자금대출 평균 금리(신규취급액 기준)는 연 4.96%에서 연 4.14%까지 떨어졌다.
전세사기 직격탄을 맞은 빌라 임차인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아파트 임대차 시장으로 넘어오기도 했다. 정부가 지난달 역전세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전세보증금 반환 용도만 대출 규제를 풀어주는 안을 내놓은 것도 그간의 전셋값 하락세에 마침표를 찍는 데 영향을 미쳤다. ○전세 매물 감소, 매매는 상승수급 불균형에 따라 향후 전셋값이 더 오를 가능성이 제기된다. 먼저 시중에서 전세 매물이 감소하고 있다. 부동산 빅데이터업체 아실에 따르면 이날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은 3만1111건으로, 여섯 달 전(4만9776건)과 비교해 37.5% 감소했다. 동작구(-63.5%), 광진구(-61.3%), 마포구(-60.4%) 등에서 낙폭이 컸다.
같은 기간 서울 아파트 매물은 5만6587건에서 7만1386건으로 26.1% 늘었다. 매매가가 오르기 시작하면서 전세를 놓기보다 아파트를 팔려는 집주인이 늘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하지만 적정 가격을 둘러싼 매수인과 매도인의 간극이 커지며 매수세는 강하게 붙지 않고 있다. 이는 역으로 전세에 계속 머물려는 수요가 많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새 아파트 공급이 줄어드는 점도 전셋값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서울 입주 물량은 올해 2만6000여 가구에서 내년 1만4000여 가구로 감소한다. 박합수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는 “공급 공백으로 내년에도 전셋값이 오를 가능성이 크다”며 “고금리 상황이 지속되면 대출받아 집을 사기 어려우니까 전세를 고려하는 수요가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오는 11월 대치동에서 6702가구 규모의 디에이치퍼스티어아이파크가 집들이를 하는 만큼 연말에 강남 일대 전셋값이 일시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