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 바다와 별…소재는 더없이 흔한데, 왜 신비롭지?

입력 2023-08-28 17:59
수정 2023-08-29 00:38
나무 등걸, 텐트, 해와 달과 별과 바다. 이재석 작가(34)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뿐이다. 작가는 이를 특유의 차분하고 고운 색감과 섬세한 묘사로 캔버스에 그려낸다.

수수한 소재를 예쁘게 그렸으니 ‘평범하게 잘 그린 그림’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완성된 그림은 더없이 낯설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그의 작품에서 르네 마그리트나 조르조 데 키리코 등 초현실주의 작가를 떠올리는 이가 많은 이유다. 관람객들은 한참을 멈춰 서서 그 비현실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궁금해하게 된다.

서울 한남동 갤러리바톤에서 열리고 있는 이 작가의 개인전은 그의 대형 작품 10여 점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시다. 전시 제목은 ‘극단적으로 복잡하나 매우 우아하게 설계된’. 이 작가는 “전시 제목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구조와 질서를 뜻한다”며 “복잡하고 거대한 세상도 평범한 사물들의 상호작용이 모여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작품을 통해 표현했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작품 속에는 작가가 군생활을 하면서 본 군용 텐트와 총기, 작업실 근처에서 본 나무 등걸이나 별 등 흔한 소재들이 마치 부품처럼 독특한 구성으로 배치돼 있다.

이번 전시 관객 중에서는 “무슨 뜻이 담긴 그림이냐”고 묻는 사람이 유독 많다는 게 갤러리의 설명이다. 그만큼 작품 분위기는 거창한 진리를 담고 있을 것처럼 신비롭다. 하지만 작가는 말한다. “저는 특별한 사람도 아니고 독특한 경험도, 엄청난 사상도 없어요. 그보다는 내 삶 속에서 보고 접한 사물을 잘 묘사하고, 이를 잘 구성해 그림에 풀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를 해석하는 건 관객 각자의 몫이겠지요.”

평범한 경험을 담은 그림이라는 건, 달리 보면 보편적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작가의 작품은 지금 한국을 살아가는 일반적인 20~30대의 정서와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작가는 여러 소재를 부품처럼 화면에 배치하고 알파벳이나 숫자로 번호를 붙인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방식에는 어린 시절부터 자유자재로 컴퓨터를 다뤄온 경험이 담겨 있다. 이 작가는 “학창 시절 게임 아이템과 지도 그래픽 등을 컴퓨터로 만드는 데 푹 빠져 있었는데, 거기서 여러 요소를 조합하고 자유롭게 배치해 전체 그림을 만들어내는 지금의 작업 방식을 착안했다”고 말했다.

노(老)화가 대부분이 수행자처럼 반복 작업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는 것과 달리, ‘효율’을 중시하는 것도 요즘 세대답다. 그는 “그림을 더 많이 그리기 위해 유화 대신 빨리 마르는 아크릴 물감을 쓴다”고 설명했다.

이 작가의 독특한 작품은 미술관과 시장에서 모두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갤러리밈(2020년)과 서울시립미술관 SeMA 창고(2021년)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일민미술관(2023년), 서울대미술관(2022년), 스페이스케이(2020년), 대전시립미술관(2019년) 등 유수 기관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여했다. 비무장지대(DMZ)에서 열리는 대규모 전시 ‘체크포인트’, 울산시립미술관 그룹전에도 참가가 예정돼 있다. 이번 전시는 오는 9월 27일까지 열린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