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와인 버리는데 2800억 쓴다고?…'뜻밖의 이유' 있었다

입력 2023-08-28 09:07
수정 2023-08-2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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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고장’ 프랑스에서 대량의 와인이 폐기처분된다. 와인 수요가 쪼그라든 탓에 가격이 하락하면서 생산업체들이 줄줄이 재정난을 겪고 있어서다. 프랑스 정부는 와인을 산업용 에탄올로 증류하는 작업에 2억유로가 넘는 예산을 배정했다.

28일 AFP통신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프랑스 농무부는 지난 25일(현지시간) 이미 생산된 와인을 폐기하기 위해 2억유로(약 2864억원)를 책정, 유럽연합(EU)으로부터 승인받았다고 발표했다. 보르도, 랑그도크 등 주요 와인 생산지가 지원금 수혜 대상이 될 전망이다. 폐기된 와인은 전량 증류해 손 세정제나 각종 세척제, 향수 등에 사용될 수 있는 산업용 에탄올로 재탄생시킬 계획이다.

프랑스 정부는 또 포도밭이 있던 땅을 뒤엎고 숲으로 바꾸거나 휴경지로 돌리는 데 동의한 생산자들에게는 보상금을 지원해주기로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보르도 지역 약 1000명의 생산자가 9200헥타르(ha?1ha=1만㎢) 규모의 포도밭을 대상으로 이를 신청했다. 이 밖에 포도 대신 올리브 등으로 경작물을 바꾸는 생산자들에게도 보상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마르크 페스노 농무장관은 이날 와인 양조장을 찾아 기자회견을 열고 “와인 가격을 방어해 와인 생산자들이 수익원을 되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함”이라고 이번 조치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와인업계는 소비 성향의 변화를 고민하고, 이에 적응해 생산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농민회에 따르면 현지 생산업체 세 곳 중 한 곳이 와인 수요 감소로 인한 도산 위기에 놓여 있다. 수요가 공급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와인 가격이 폭락한 탓이다.

지구 온난화로 기온이 높아지면서 최근 몇 년 새 포도 수확 시기가 3~4주가량 앞당겨졌고, 생산량도 급격히 늘어났다. 업계에 따르면 올해 잉여 생산량은 300만헥토리터(hl, 1hl=100ℓ)로 추정된다. 지난해 연간 생산량(420만hl)의 7% 수준이다. 랑그노크의 와인 생산자 협회를 대변하는 장-필리프 그라니에는 “우리는 너무 많이 생산하고 있다”며 “판매가가 생산비를 밑돌아 손해가 막심하다”고 전했다.

반면 수요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칸타르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의 레드와인 소비량은 지난해까지 10년간 32% 줄었다. 프랑스에만 한정된 현상은 아니다. EU 집행위원회 조사에선 올해 와인 소비량이 포르투갈(-34%), 독일(-22%), 프랑스(-15%), 스페인(-10%), 이탈리아(-7%) 등 유럽 전역에서 뒷걸음질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와인이 소비되는 지역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간 식당과 술집 등이 봉쇄된 영향이 컸던 데다, 최근 들어서는 술 자체를 선호하지 않거나 와인 대신 맥주를 택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최대 소비국인 중국에서의 수요 둔화, 인플레이션에 따른 비 필수품 지출 감소 등도 와인 소비를 짓누르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대량으로 생산되는 저가 와인 대신 프리미엄 와인과 샴페인에 대한 수요는 비교적 견조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LVMH나 페르노리카 등 대기업들은 위스퍼링 엔젤, 세인트 마거릿 앙 프로방스 등 고급 로제 와인을 잇달아 출시하며 시장 확장에 나서기도 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