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마음이 아주 풍족해져서 갑니다!”
노끈으로 묶은 헌책 뭉치를 들고 문밖을 나서면서 백발의 손님은 이범순 고구마헌책방 대표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어요. 미술대 교수라는 그가 사간 책은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 과월호. 근현대 시기 이 잡지의 표지를 장식한 김환기, 장욱진, 천경자 등 당대의 ‘젊은 화가’들은 이제 거장의 반열에 올랐죠.
얼마 전 경기 화성시 팔탄면에 있는 ‘인터넷 헌책방 고구마’의 창고 겸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꾸지뽕밭 옆에 서 있는 컨테이너 건물에는 이런 문패가 걸려 있었어요. ‘그렇게 안 보이지만 서점.’
언뜻 봐서는 진가를 알아볼 수 없는 게 헌책과 닮았어요.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낡은 종이지만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보물이 되는 게 헌책이니까요.
건물 문을 열고 들어서면 헌책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쳐옵니다. 그리고 30만 권이 넘는 헌책이 2층까지 들어선 압도적 풍경을 마주하게 되죠. 1950년대 반공 만화책부터 지금은 절판된 과거 잡지들, 시집 초판까지 없는 책이 없어요. 인기곡 ‘미인’이 수록된 ‘신중현과 엽전들’ 1집을 비롯해 LP도 8만 장 넘게 꽂혀 있고요.
고구마는 국내 1세대 온라인 중고서점입니다. 예스24, 알라딘의 원조라고 할 수 있죠. 누적 회원만 6만 명이랍니다. 시를 사랑하는 문학청년이었던 이 대표는 1984년 서울 금호동에 ‘중앙서적’이라는 헌책방을 열었어요. 가게를 홍보하려고 제작한 인터넷 홈페이지를 1998년 전자상거래 사이트로 개편하면서 8평(26.4㎡)짜리 헌책방은 200여 평(약 661㎡)까지 늘어났죠.
한때는 10명이 넘는 직원과 함께 일한 이 대표는 이제 홀로 고구마를 운영 중입니다. 일흔에 가까운 그는 올초 고구마 사이트에 공지사항을 띄웠습니다.
“저는 고구마책방을 40년 정도 운영해온 이범순이라고 합니다. 제가 은퇴를 하려고 결심해서 책방을 매매하려고 합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구마와 이 대표는 참 유명합니다. 최초의 한글전용 가로쓰기 잡지 ‘뿌리깊은 나무’ 전권, 윤동주 시인도 못 구했다던 백석 시인의 초판 시집 등의 소장자로 신문 기사에도 몇 차례 소개됐죠.
“백석 시인이 정지용 시인에게 직접 사인해 선물한 시집이었는데, 이후 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이 밤새 졸라서 어쩔 수 없이 팔기도 했어요.”
책을 팔려는 사람만 많고, 사려는 사람은 예전만 못하다고 말하는 그는 여전히 헌책을 매입해 사이트에 올립니다. 혼자 운영이 힘들어 신규 가입을 막아놨는데도 단골들의 주문, 비회원 주문 등이 이어져요.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책들이 있기 때문이죠.
예컨대 고구마에는 전국 학교의 졸업앨범이 수백 권 있어요. 언젠가 어느 중학교 몇 년도 졸업앨범을 찾아달라는 연락이 왔더랍니다. “‘내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중퇴하느라 졸업앨범이 없습니다. 같이 학교를 다닌 친구들 얼굴이 가물가물합니다’고 말한 분에게 졸업앨범을 구해다 드렸더니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최근 몇 년 내에 출간된 깨끗한 책만 거래하는 대형 중고서점과 달리 고구마에서 이 대표의 헌책 매입 기준은 훨씬 더 복잡해요. 학술적 가치가 있거나 책의 만듦새가 특이해 서지학적 가치가 있는지, 절판됐지만 꾸준히 찾는 사람들이 있는 책인지, 저자의 서명처럼 의미 있는 흔적이 남아 있는지…. 이런 걸 모두 따져 책을 사고파는 게 그의 40년 내공이죠.
“조카딸이 헌책방을 물려받고 싶다고 1년간 같이 일했는데, ‘자신이 없다’고 포기했어요. 책방을 매입하겠다는 사람에게는 한동안 노하우를 전수해줄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이 공간의 이름은 ‘고구마’일까요. “고구마는 서민적이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줍니다. 책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헌책방은 사람들에게 영혼의 허기를 달래주는 장소였지요.” 이 대표는 “지금도 아침을 고구마로 먹을 정도로 평생 안 질리는 게 고구마, 그리고 책”이라며 웃었어요.
그가 40년간 책의 곁을 지키는 동안 사람들이 책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책을 귀하게 읽느라 표지를 달력이나 잡지로 감싸 보호하는 경우가 많았죠. 요즘은 마치 일회용품처럼 짧게 소비되는 책이 늘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길을 나서는데, 건물 벽에 붙어 있는 낙엽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는 “매입한 헌책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 마음이 너무 좋아서 붙여뒀다”고 했어요. 이름 모를 누군가가 낙엽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를 한 자 한 자 적은 뒤 코팅해둔 것이죠. 직접 지은 시였을까요? 올가을 낙엽이 질 때쯤, 우리 곁엔 어떤 책이 있을까요?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