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오피스 빌런

입력 2023-08-21 18:16
수정 2023-10-31 13:33
히어로 영화의 악당 ‘빌런(villain)’은 애칭으로도 많이 쓰인다. ‘순정 빌런’이라는 제목의 웹툰도 있고,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스타가 된 배우 허성태의 수식어는 ‘글로벌 빌런’이다. 그런데 빌런이 붙어 만인을 찡그리게 하는 합성어가 있다. ‘오피스(office) 빌런’이다. 직장에서 갑질하는 상사에게만 국한한 말이 아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동료는 물론 후배 직원도 오피스 빌런이 될 수 있다.

한 취업 포털사이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오피스 빌런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일반 사원들이 꼽은 최악의 오피스 빌런은 ‘궁예형’이다. 관심법(觀心法)을 쓴다는 궁예처럼 상사가 ‘딱 보니 네가 나를 우습게 여기는 것 같은데…’라는 식으로 접근하니 사원들이 가장 짜증 날 법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질문하는 ‘질문봇형’, 칼퇴근하는 ‘신데렐라형’과 반대로 계속 자리를 지키면서 퇴근하는 부하 직원들을 눈치 보게 하는 ‘지박령(地縛靈)형’도 밉상이다. 지박령은 죽은 곳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영혼이다.

오피스 빌런의 사례와 대응법을 소개한 책도 나왔다. 로펌 율촌의 노동 전문 조상욱 변호사가 쓴 <선 넘는 사람들>이다. 조 변호사는 오피스 빌런을 산신령이라고 한다. 산(기업)마다 하나씩 있고, 수틀리면 내려와서 마을 사람들(직원)을 힘들게 하는 심술 맞은 신통력을 갖고 있어서다.

요즘 가장 문제가 되는 오피스 빌런은 직장 괴롭힘 가해자가 아니라 직장 괴롭힘 허위 신고자라고 한다. 2019년 7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후 지난해까지 신고된 2만300여 건 중 고용노동부가 문제 있다고 본 사례는 14%에 불과하다. 우리보다 앞서 제도를 도입한 호주, 프랑스 등에서는 6개월 이상 또는 주 1회 등 지속성과 반복성의 잣대를 대는데, 우리나라는 정의 자체가 모호하다. 공무원에게는 무고죄가 적용되나, 민간 기업에는 허위 신고 제재가 없는 것도 문제다.

조 변호사는 맘에 안 드는 부서장 교체, 근로계약 갱신 등을 위해 법을 악용하는 사례가 적잖다며 거짓 신고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른바 ‘을(乙)질’의 심리를 표현할 때 자주 인용되는 영화 ‘부당거래’ 속 명대사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