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최근 미국은 세계 최대 소포 배송업체 UPS의 임금 인상 뉴스로 떠들썩하다. 노사 합의로 이 회사 택배기사의 연봉이 앞으로 5년간 17만 달러(약 2억2500만원) 수준으로 오르기 때문이다. 웬만한 미국의 빅테크 기업의 평균 연봉보다 높은 수준이다.
UPS의 이같은 임금 타결은 미국 노동시장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서비스직을 중심으로 한 구인난으로 노동시장의 임금이 지속해서 오르고 있어서다. 이들의 임금 상승세가 겨우 둔화한 인플레이션을 다시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도 상당하다. 인공지능(AI)으로 인해 노동시장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챗GPT의 등장으로 지식 전문직은 AI로 대체될 수 있지만 택배기사와 간호사, 웨이터 등 육체노동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직은 여전히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한해 2억 2500만원 받는 택배기사UPS 경영진과 트럭 기사 노조인 팀스터스는 지난달 25일 UPS 기사 연봉을 17만 달러로 인상하기로 임금 협상을 타결했다. 지난 22일(현지시간)엔 UPS 노사가 합의한 임금 인상안이 노조원 투표에서 80% 이상의 지지를 얻어 가결됐다. 합의안에 따르면 이 회사 노사는 직원들의 시급을 최소 7.5달러 인상하고, 시간제 근로자의 최저임금을 시간당 17달러에서 21달러로 올리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이 회사 정규직 근로자의 평균 급여는 연 14만5000달러에서 17만달러로 올라간다.
원화로 약 2억 2500만원 수준인 UPS 운전기사의 연봉은 미국 엔지니어의 평균 기본급인 9만 2000달러의 두배 가까이 되는 액수다. 노사가 이견을 보이는 일부 쟁점만 접점을 찾으면 전체 합의안은 30여만 명의 UPS 직원에게 적용된다. 이로 인해 미국의 온라인 구인 게시판에서 ‘UPS’ 검색이 50% 이상 증가하기도 했다. 미국인 중위 소득 훨씬 웃돌아UPS 기사의 연봉은 미국인 평균 소득의 세 배 수준이기도 하다. 미국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인의 연령별 중위 소득을 살펴보면 25~34세 5만 752달러, 35~44세 6만1360달러로 나타났다. 팬데믹으로 배송 물량이 급증하면서 지난해 UPS 순이익은 110억달러로 2019년에 비해 70% 증가했다. 이에 따라 노조는 회사 측에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회사 측은 택배기사가 부족한 상황을 감안해 노조 측 요구안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번 인상은 40년 만에 미국에서 가장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상승률은 지난해 9월 전년동월대비 9%를 찍은 후 지금까지 둔화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3% 이상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생활 물가가 올라가니 노동자들은 임금 상승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UPS로서도 임금을 올려주지 않고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최근 몇 주 동안 팀스터스 노조의 파업 위협으로 인해 고객들이 하루에 약 100만 개의 패키지를 경쟁업체로 돌리면서 UPS는 약 2억 달러의 매출 손실을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미국은 현재 산업 전반에 걸쳐 구인난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UPS의 연봉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임금과도 큰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많다. 약 3000개 기술 회사의 구인 목록 및 보상 데이터를 조사하는 웹사이트 컴프리헨시브에 따르면 미국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연간 13만 2000달러(약 1억7500만원)에서 20만 달러(2억6500만원)를 받는다. 제품 관리자는 13만 3000달러에서 19만 7000달러의 연봉을 수령한다. 계정관리자의 연봉은 11만 1000달러에서 14만 7000달러다. UPS 택배 기사의 연봉 17만 달러는 여느 빅테크 기업과 견줘 뒤지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빅테크 기업들의 경우 노동 유연성을 보장받아 해고가 쉬운 반면, UPS는 강성 노조를 결성해 근로자 입장에선 안정적인 고용환경을 보장받는다. 의료서비스 부문 심각구인난은 공식 노동지표에서도 나타난다. 미국의 7월 비농업 부문 고용 건수는 18만 7000명 증가했다. 월평균 증가율인 31만 2000명보다 낮았지만, 여전히 서비스 부문에선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7월에 의료 서비스는 6만3000개의 일자리를 추가했다. 이는 이전 12개월 동안의 월평균 증가 수인 5만1000개에 비해 많이 증가한 수치다. 실제 미국은 간호사 및 요양 서비스 부문에서도 심각한 인력 부족을 겪고 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의 고령 인구가 늘고 있는 반면 해당 서비스 부문 인력이 부족해 개도국의 간호사까지 미국으로 의료 이민을 떠나는 열풍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력난이 심각해지자 미국의 의료서비스 부문에선 ‘긱 이코노미(gig economy)’로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긱 이코노미는 기업에서 그때 발생하는 업무 수요에 따라 계약직·프리랜서 형태로 사람을 초단기 고용하는 경향이 커진 경제 현상을 말한다. 과거 차량 공유 업체·배달업체 위주였던 노동 시장 트렌드가 전문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대형 병원 그룹인 애드버킷헬스케어와 프로비던스 등은 필요한 시간대의 간호사 인력 보충을 위해 시프트키·케어레브 등 플랫폼을 활용하고 있다. 이들 플랫폼은 알고리즘을 활용해 간호사들이 선호하는 시간대 급여를 낮추고 야간·휴일 근무에는 수당을 높이는 식으로 병원과 간호사를 매칭해 주고 있다. 병원으로선 불필요한 인건비 지출을 줄이고 갑자기 생긴 빈자리를 채워 인력 운용의 불확실성을 낮출 수 있다. 공중 보건 전문 저널 헬스어페어에 따르면 2020~2021년 미국 내 간호사 고용 건수는 10만 명 이상 감소했다. 이는 조사가 시작된 40여 년 동안 가장 큰 감소 폭이다. 인력난이 심화하면서 간호사들의 인건비도 급등했다.
하지만 긱 이코노미 활용으로 최근 인력난이 최악의 상황은 면하고 있다는 평가다. 프로비던스는 1년 전 ‘긱 간호사’를 추가해 간호사와 기타 의료 직종에 1만3000개의 교대 근무 일자리를 채웠다고 분석했다. 이 밖에 코로나19 펜데믹 해제로 달아오른 여행 및 레저 수요로 인해 관련 인력을 구하기도 어렵다. 민간고용정보업체인 ADP(Automatic Data Processing)에 따르면 7월 민간 일자리가 호텔과 접객업에서도 20만1000개나 증가했다. 이어 △자원 및 광업 4만8000개 △정보업 3만600개 △무역 운송 및 유틸리티 3만개 △교육 및 보건 서비스 1만2000개 △건설9000개 등이 뒤를 이었다. 이에 따라 지난해 기준 레스토랑 종업원의 시간당 임금 중간값은 14달러로 미 연방정부 최저임금의 거의 2배에 육박했다.팁으로 고용 유지일각에서는 미국의 사업체들이 팁 문화를 장려함으로써 고용 부담을 덜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기 불확실성으로 고용을 늘리지 못하지만, 직원이 손님에게서 팁을 받도록 허용하면서 인건비 부담을 줄인다는 분석이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사태 이전 미국 식당에선 통상 음식값의 10% 수준을 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30%까지 늘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왜 사업체들은 팁 요청을 멈추지 못할까’라는 분석 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WSJ에 따르면 최근 미국에선 주스 가게, 가전제품 수리 업체를 비롯해 식물을 가꿔 파는 업체까지도 고객에게 팁을 요구하고 있다. 급여 제공 업체 구스토가 30만 개의 중소기업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6월 현재 비레스토랑 레저·접객업에 종사하는 서비스 부문 노동자들은 시간당 평균 1.35달러의 팁을 받았는데 이는 2019년의 시간당 1.04달러보다 30% 증가한 금액이다. 미국의 외식 산업에서 노동자에게 주는 팁 비용은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간 확 늘었다. 전염 가능성으로 식당의 고객 서비스 직원이 적어지면서 이들에게 주는 고객들의 팁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엔 기업들이 다른 이유에서 팁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직원이 팁을 받으면 외식업체들은 임금을 올리지 않고도 임금을 인상한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경제학자인 셰헤자데 레만 조지워싱턴대 국제금융학 교수는 “미국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팁 의존도가 높다”며 “미국 기업들이 직원 급여에 대한 책임을 고객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향후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팁에 대한 의존도는 더 커지고 있다. 섣불리 임금을 올렸다가 경기 침체로 직원을 해고해야 할 시점이 오면 경영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조너선 모덕 뉴욕대 공공정책 및 경제학 교수는 “기업들이 여전히 경기 침체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기 때문에 더 높은 임금에 묶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고공 행진하는 인플레이션에 부담을 느끼던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팁 문화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금융 서비스 회사인 뱅크레이트가 지난 5월 약 2400명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1%는 기업이 팁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직원들에게 더 나은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3분의 1은 팁 문화가 사라져야 한다고 응답했다.
뜨거운 노동 시장 때문에 미국의 대학 진학률마저 떨어지고 있다. 굳이 비싼 학비를 내고 대학에 가는 것보다 일찍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추세다. 미국에서 최근 고교를 졸업한 16∼24세 연령층의 대학 진학률이 지난해 62%로 팬데믹 직전인 2019년 66.2%에서 뚝 떨어졌다.노동시장의 구조 변화택배기사와 간호사, 숙박 및 외식 산업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앞으로 더 올라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상된다. 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일자리는 오히려 AI에 대체될 위험이 크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5월 미국 기업이 인건비 감축을 목표로 줄이고 있는 화이트칼라 노동력이 과거 수준으로 회복하기 힘들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보도했다. 인공지능(AI)이 해당 인력의 빈자리를 채울 가능성이 높아서다. 실제 최근 미국 노동시장에서 화이트칼라 실업자는 급격히 늘고 있다. 비영리단체 ‘임플로이 아메리카’에 따르면 올해 3월에 마감된 2023년 회계연도 기간 증가한 화이트칼라 실업자는 15만 명에 이른다.
페이스북의 모회사 메타의 최고경영자(CEO)인 마크 저커버그는 최근 인원감축을 단행한 뒤 직원들이 떠난 자리가 앞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인원이 감소하더라도 AI 등 새로운 기술 덕분에 회사는 더 효율적으로 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빈드 크리슈나 IBM 최고경영자(CEO) 또한 5년 이내에 인사 분야 등 7800명의 일자리를 AI로 대체할 것이라고 밝혔다. 직원 수가 43만 명에 달하는 미국의 대형 유통체인 크로거의 CEO 로드니 맥멀린은 "AI의 등장으로 아주 많은 일자리가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화이트칼라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면서 대우도 나빠지고 있다. 패스트푸드 체인 맥도날드는 최근 일부 관리직 직원들에게 정리해고 대상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보너스나 급여 삭감 등에 합의하라고 통보하기도 했다. 반면 각종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의미하는 '블루칼라'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부에 따르면 오는 2031년까지 식당 요리사와 패스트푸드 음식점 종업원, 화물 운송 등 1년에 3만2000달러 정도를 받을 수 있는 블루칼라 일자리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골드만삭스 또한 비슷한 전망을 내놨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3월 전 세계 일자리의 최대 4분의 1이 AI를 바탕으로 한 자동화로 대체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히 행정과 법률 분야에 끼치는 영향이 막대할 것이라고 했다. 골드만삭스는 "미국 내 행정 업무의 46%, 법률 업무의 44%가 AI로 대체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블루칼라 노동자에 끼치는 영향력은 미미할 것으로 봤다. 블루칼라 노동으로 분류되는 직종들의 대체 확률은 건설업은 6%, 유지보수업은 4%에 불과했다.
뉴욕=박신영 특파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