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리움미술관에는 불문율이 하나 있었다. 작고한 거장들의 개인전만 연다는 것이다. 2012년 리움미술관이 처음 ‘살아있는 작가’의 개인전을 연다고 했을 때 미술계가 떠들썩했던 건 그래서다.
그 작가가 설치미술가 서도호(61·사진)였다. 젊은 나이(당시 50세)에 이미 미국 뉴욕 휘트니미술관, 영국 런던 서펜타인갤러리,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 등에서 전시할 정도로 인정받는 예술인이다.
지금은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서도호가 지난 9일 서울 용산CGV에 등장했다. CJ문화재단이 제작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서도호의 움직이는 집들’ 상영회 겸 대담회를 위해서다. 다큐가 끝난 뒤 무대에 오른 서도호는 관객 앞에서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큐레이터와 약 30분간 대담했다.
다큐는 2012년 리움에서 연 전시회를 중심으로 서도호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담았다. 11년 전 리움이 그를 택한 건 ‘집’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적 지낸 서울 성북동의 한옥, 미국 뉴욕 유학 시절 묵은 아파트 등의 공간을 폴리에스터 천으로 한땀 한땀 꿰매 작품으로 만들었다. 복도, 문고리, 세면대, 가스레인지, 욕조 등 그와 함께한 모든 공간의 디테일이 실제 크기 그대로 전시장에서 되살아난다.
기억을 따라 어림잡아 만들 법도 한데, 그는 대충 하는 법이 없다. “뉴욕에 세 들어 살던 집을 구현하기 위해 집주인에게 실측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죠. 6년이 걸리더군요. 작품을 위해 사적인 공간을 개방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 집을 더욱 압도적으로 만들어주는 건 재료다. 그는 폴리에스터 천이나 여름용 한복을 지을 때 쓰는 은조사로 집을 짓는다. 너무나 얇고 가벼운 나머지 빛이 그대로 투과된다. 이런 천으로 만든 거대한 집을 보고 있노라면 환상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든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집은 마치 옷과 같다고. 옷이 내 몸을 보호하듯이, 집은 사람을 보호해주는 공간이잖아요. 건축이 옷의 확장판이라고 생각한 거죠.”
서도호는 이렇게 만든 집을 여행가방처럼 접어서 옮겨 다닌다. 그럴 때마다 작품의 제목도 변한다. ‘서울 집’ ‘서울 집/L.A. 집’ ‘서울 집/L.A. 집/뉴욕 집’ 이런 식으로.
“저는 시간과 공간은 함께 붙어 다닌다고 생각해요. 제가 서울에서 만든 집을 다른 곳으로 옮긴 다음 들어가 보면 옛날로 되돌아가는 듯한 ‘프루스트 효과’를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보는 집은 새로운 곳이잖아요. 시공간을 아우르는 ‘이동성’, 이것이야말로 제가 계속 붙잡을 주제입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