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들보다 학교에 머문 기간이 길다. 초·중·고교를 거쳐 대학과 대학원, 그리고 지금 직장인 학교 근무 기간까지 합한다면 인생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낸 셈이다. 가방끈이 길다 길다 이렇게 길 수가 없다. 인생의 황혼기를 살고 계신 어머니는 학교에 가기 제일 싫어하던 사람이 제일 오래 학교에 머문다며 인생은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듯 신기해하신다.
작가가 되는데 대학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학교를 그만두겠다던 열아홉 살의 나. 그리고 같은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학생을 붙잡고 설득하는 지금의 나.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얼굴의 내가 학교를 배경으로 겹칠 때가 있다. 내 인생의 기본 배경이 학교가 된 이후, 내가 어쩔 수 없이 감내하고 있는 나의 업보다. 지나고 나면 보이는 것들, 지나고 나야 보이는 것들, 그리고 지나고 나서 보여야 하는 것들.
내가 대학과 대학원에 입학할 무렵, 공교롭게도 나의 은사님들은 지금의 나보다 ‘조금’ 많은 나이였다. 가끔 나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그분들을 몰래 쳐다본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대, 비슷한 나잇살, 비슷한 주름살을 가진 은사님들은 내 기억 속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르다. 그때는 한참 어른인 줄 알았는데….
나만큼이나 마음의 키가 작아진 그분들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짠해진다. 수업 중에 도망가지 말걸. 수업 중에 딴생각하지 말걸. 수업 중에 이러지 말걸 저러지 말걸, 말걸, 말걸…. 스승의 날도 아닌데, 갑작스레 스승의 날처럼 분위기를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이유는 지금이 방학이기 때문이다. 지난 학기의 끝과 새 학기의 시작 사이에서 나는 지금 지난 학기 반성문과 다음 학기 출사표를 동시에 쓰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대사를 슬며시 가져와 말이다.
누가 그러더라. 세상에서 제일 폭력적인 말이 ‘남자답다’ ‘여자답다’ ‘엄마답다’ ‘의사답다’ 뭐 이런 말이라고. 그냥 다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서 서툰 건데, 그래서 안쓰러운 건데, 그래서 실수 좀 해도 되는 건데.
2014년 방영된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극본 노희경, 연출 김규태)는 베스트셀러 작가 장재열과 정신과 의사 지해수의 사랑 이야기다.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삶을 살아가는 데 서툰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보듬어가는 아름다운 성장 드라마다. 드라마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성장 서사는 어린 시절 가정 폭력 트라우마 때문에 키만 자라고 마음이 자라지 않은 ‘상처받은 영혼’ 장재열의 몫이다. 배우 조인성의 186㎝ 키를 장착한 장재열은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없는 완벽한 남자지만 마음 안에 작은 아이를 품고 다닌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장재열에게만 보이는 작은 아이. 상처 많은 맨발을 길바닥에 내놓고 다니는 작고 연약한 아이.
극 후반부에 장재열은 자기 안의 작은 아이와 이별 의식을 치른다. 정성을 다해 발을 닦아주고 신발을 신겨주고 그렇게 아이에게 작별을 고한다. 카메라는 키만 훌쩍 커 버린 어른아이가 마음속 작은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보듬는 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마치 ‘넌 혼자가 아니야’ 하고 그 옆을 지켜주듯이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장재열 옆에는 연인 지해수 역을 맡은 배우 공효진과 더불어 많은 사람이 있다. 성동일, 이성경, 이광수…. 감탄이 절로 나오는 초호화 출연진이다. 하지만 ‘상처받은 영혼’ 장재열처럼 그들 또한 마음 어딘가 조금씩 아프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빈틈을 메워주며 ‘따로 또 같이’ 앞으로 나아간다.
만약 우리가 타인의 마음 안에 있는 작은 아이를 볼 수만 있다면, 그래서 서로에게 한 줌의 마음만큼 너그러워질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결 몽글몽글해지지 않을까. 내 서랍 속 수줍음 많은 아이를 조심스레 세상 밖으로 내보내며 다음 학기 내게 배울 학생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나도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서, 나도 여전히 배우고 있다고, 그러니 우리 함께 도와가며 잘해보자고.
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