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 전략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비관론 퍼진 이유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입력 2023-07-27 07:44
수정 2023-07-27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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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기업인 TSMC의 구형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는데 혈세를 5조원이나 들이는게 국익에 도움이 되느냐는 논란의 결론은 일본의 신생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가 독자적으로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라피더스가 공언한 대로 2027년부터 2nm급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일본이 쏟아부은 모든 비용과 노력은 아깝지 않게 된다. 반대로 실패한다면 일본의 반도체 부활 전략 자체가 허물어지게 된다.

한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취재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 가운데 라피더스의 성공을 점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하나같이 "반도체 공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말이 안되는 소리라는 걸 안다"고 했다. 타이어와 자동차 부품 경쟁력이 뛰어난 오토바이 메이커가 갑자기 포뮬러1 슈퍼카를 만들 수는 없지 않냐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주도한 산업재편 전략이 성공한 전례가 없다는 점도 비관론을 뒷받침한다. 1999년 히타치제작소와 NEC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통합한 엘피다메모리는 2012년 파산해 미국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인수됐다.

미쓰비시전기, 히타치, NEC의 반도체 부분을 통합한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는 만년 적자를 면치 못하다가 공적자금의 지원을 받았다. 현재는 자동차용 반도체 생산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세계 시장에서의 존재감은 크지 않다. 단독으로 차세대 반도체를 개발할 능력도 없다는 평가다.



라피더스는 일본 정부와 도요타자동차, 소니그룹, NTT, NEC, 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 등 일본 대표 기업 8곳이 공동으로 설립했다. 일본 재계 역사상 다수 기업의 집단 지도체제가 성공한 사례도 거의 없다. 기업마다 의사결정 구조와 사풍이 제각각이어서 이해관계를 일치시키는게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30년 장기 침체의 영향으로 책임을 안지려는 문화, 반대로 말하면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문화가 뿌리 깊은 점은 공동 프로젝트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간 원인으로 분석된다. 일본 기업의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 회의'의 무한 반복은 유명하다.

라피더스의 히가시 데쓰로 회장은 일본 최대 반도체 장비 기업이 도쿄일렉트론의 회장, 고이케 아츠요시 사장은 미국 반도체 기업인 웨스턴디지털재팬 회장을 지냈다.



소니그룹, NTT 등 일본의 대기업은 사장 임기를 마치고 경영 최전선에서 한 걸음 물러난 회장과 부사장에서 승진한 사장의 '투톱 체제'가 많다. 회장·사장 투톱 체제가 좋게 끝난 사례도 거의 없다.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장비업계에서 성공 신화를 쓴 회장과 반도체 기업의 전설인 사장을 동시에 선장으로 맞이한 라피더스호의 항해도 순탄치 않을 것이란 예상이 벌써부터 나온다.

자금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다.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하려면 10년간 5조엔이 필요하지만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 확정한 지원금은 3300억엔에 불과하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