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선 유럽을 배경으로 만든 뮤지컬이 유독 인기다. 그중에서도 모차르트, 베토벤 등 유럽 예술가의 생애와 음악 세계는 뮤지컬의 단골 소재다. 그들이 남긴 예술적 자취는 시대와 공간을 넘어 감동을 주지만 국내 배우들이 가발을 쓰고 중세 유럽 복장을 한 채 노래와 연기를 하는 모습은 어쩔 수 없는 이질감을 준다.
얼마 전 개막한 뮤지컬 ‘라흐 헤스트’(사진)는 낯선 배경이나 문화권으로부터 오는 이질감에서 자유롭다. ‘천재 시인’ 이상, ‘추상화의 대가’ 김환기처럼 국내 예술가들이 등장하는 뮤지컬이라서다. 다만 작품의 주인공은 이상이나 김환기가 아니라 그들의 부인 김향안이다.
수필가이자 미술평론가, 서양화가인 김향안(본명 변동림)은 시인 이상과 결혼했다가 이상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결혼 생활이 4개월 만에 끝났다. 이후 화가 김환기와 재혼해 여생을 보낸 실존 인물이다. 뮤지컬은 ‘예술가의 아내’로서의 김향안뿐만 아니라 스스로 꿈 많고 재능 있는 아티스트였던 그의 모습을 비춘다.
작품은 김향안을 이상과 사랑에 빠지고 사별하기까지의 ‘동림’과 김환기를 만난 뒤의 ‘향안’ 두 캐릭터로 나눠 ‘2인 1역’으로 표현했다. 그가 매일 일기처럼 쓰는 수첩이 젊은 시절의 동림과 좀 더 성숙해진 향안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동림과 향안이 직접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장면에선 한 개인의 다사다난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치유하는 느낌이 든다.
김향안의 이야기뿐 아니라 서정적인 음악과 아름다운 가사로 이상과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담았다. 이상의 ‘날개’ ‘오감도’ 등의 구절이 대사와 가사 곳곳에 인용됐고, 김환기 작품의 특징인 점과 선, 면의 미학 등을 무대와 조명, 영상 등으로 구현했다. 그들이 시와 그림을 완성하며 거치는 고민과 생각의 과정이 녹아들어 있다.
시와 그림 그리고 음악으로 가득 채워진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이다. 해외 진출 계획도 있다. 오는 10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열리는 ‘K뮤지컬 로드쇼’에 참가할 예정이다. 번역 등 과정만 잘 거친다면 해외 관객에게도 충분히 다가갈 수 있는 메시지와 소재다. 공연은 9월 3일까지 서울 동숭동 드림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