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미국 사모펀드 운용사 엘리엇에 약 1300억원을 지급하란 중재 판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법무부는 18일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에 손해배상 판정을 정정해달라고 신청하고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취소소송을 냈다고 발표했다. 중재판정부는 앞서 지난달 20일 정부가 2015년 국민연금에 찬성표를 행사하라고 압박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성사됨으로써 손실을 봤다는 엘리엇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우리 정부에 손해배상금 5358만달러(약 690억원)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엘리엇의 법률비용 2890만달러(약 372억원)도 내라고 한 것까지 고려하면 이번 판정으로 정부가 지출해야 할 금액만 약 1300억원에 달한다.
정부는 이번 사건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 국가가 책임져야 할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ISDS) 자체를 신청할 수 없다고 봤다. 일단 ‘소수주주는 자신의 의결권 행사를 이유로 다른 소수주주에게 어떤 책임도 부담하지 않는다’는 상법상 원칙을 근거로 제시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을 추진할 당시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지분 11.21%, 엘리엇은 7.12%를 보유하고 있었다. 법무부 관계자는 “삼성물산의 여러 소수주주 중 하나인 국민연금이 자신의 의결권을 행사한 것을 두고 다른 소수주주인 엘리엇의 투자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중재판정부가 국민연금을 ‘사실상의 국가기관’으로 규정한 것도 잘못된 판단이라고 봤다. 한미 FTA에선 ‘사실상의 국가기관’이란 개념이 없기 때문에 이 같은 개념을 근거로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미국 정부가 이번 중재판정 과정에서 제출한 비분쟁당사국 의견서를 통해 “한미 FTA상 당국의 조치로 인정되는 ‘당국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는 비정부기관의 조치’에는 ‘그 기관이 위임받은 정부 성격의 권한 범위를 벗어난 행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는 점도 근거로 댔다.
엘리엇과 같은 이유로 삼성물산 주주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내 법원이 국민연금이 독립된 의결권을 행사했다고 판단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22부는 지난 1월 삼성물산 주주 72명이 엘리엇처럼 “정부의 위법 행위로 합병이 성사돼 손해를 봤다”며 국가에 약 9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국민연금 투자위원회는 주식시장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합병이 무산됐을 때 기금 운용에 미칠 영향 등을 고려해 독자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했다”며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장관 등이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인정하나 이 같은 직권남용 행위와 주주들의 손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중재판정부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과정에 보건복지부 등의 부당한 개입이 있었다는 국내 형사재판 결과를 상당 부문 인용했지만 이 사건은 법리적으로 형사재판 판결과는 궤를 달리한다”며 “취소소송을 제기해 판정을 바로잡지 않으면 국내 공공기관과 공적기금의 의결권 행사를 두고 부당한 ISDS가 제기되는 일이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소중한 세금이 헛되이 유출되지 않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