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제조가 한국의 사양 산업이라는 오해 [긱스]

입력 2023-07-30 17:50
수정 2023-07-30 17:51
이 기사는 프리미엄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 한경 긱스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소비자의 얼굴형을 정밀 분석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안경을 맞춤 제작’한다." 안경 브랜드 ‘브리즘’을 운영하는 콥틱의 철학입니다. 박형진 콥틱 대표는 한국의 안경 산업이 결코 사양 산업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동안 쌓아온 제조 노하우와 앞선 정보기술(IT) 결합을 통해 안경 제조업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 안경 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글을 한경 긱스(Geeks)에 보내왔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대구국제광학전(DIOPS·디옵스) 행사가 열린다. 하지만 필자는 처음 참관한 2005년 이래 이 행사가 ‘국제광학전’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3조원 규모의 국내 안광학 산업을 대표하는 전시회라는 설명조차 무색할 정도로 매년 이 행사는 활력을 잃어왔다.

1990년대까지 안경은 한국의 대표적 수출 상품 중 하나였다. 1995년 기준 한국은 3781만달러를 수출하던 세계 2위 안경 수출 대국이었다. 당시 249만달러에 불과하던 안경 수입액은 2018년 기준으로 100배 가까이 커진 2억3000만달러에 육박할 정도가 됐지만, 수출액은 오히려 10% 줄어든 3327만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마디로 메이저리그에서 강등된 마이너리그 선수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 올해 디옵스에는 오랜만에 외국인 바이어들이 많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필자가 뉴욕에서 만난 적 있는 미국의 대표적 안경 유통 기업 클리어비전옵티컬(CVO)의 데이비드 프리드펠드 대표도 포함돼 있었다. CVO는 유럽계가 휩쓸고 있는 미국 안경 유통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미국 토종 안경 유통 기업 중 한 곳이다.

70년 전 창업한 아버지를 이어 2대째 경영하고 있는 데이비드 대표는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런 그의 입에서 꽤 정확한 발음으로 ‘삼성광학’ ‘삼원산업’ 같은 이름들이 술술 나왔다. 선친이 1990년대까지 대구에서 꽤 많은 양의 안경테를 수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한 중국의 안경 제조사들로 거래처가 바뀌면서 정작 자신은 한국을 방문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런데 왜 이제서야 한국을 찾았을까. 데이비드 사장은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미·중 관계 악화로 인한 ‘디리스킹’이라 했다. 지난 20년간 절대적으로 의존해온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수입원의 개발이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안경을 믿을 만한 품질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 중국 등 6개국에 불과하다. 엄청난 첨단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꽤 높은 수준의 노하우와 생태계가 구성돼야 하기 때문에 의외로 안경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나라가 적다.

안경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제외하면 독일 일본 한국 중국 정도가 대량 생산이 가능한 나라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을 제외한 선진 4개국은 높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고급 프리미엄 제품 위주로 생산한다. 따라서 중국과 경쟁해 저렴한 가격대의 제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는 데이비드 사장의 부인과 딸들이 빠져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궁금증이었다고 한다. 부인과 두 딸, 두 며느리의 요청으로 한국 화장품만 200만원어치를 구매했을 정도로 집안 여성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다고 했다. 예전에는 관심 없던 '메이드 인 코리아' 딱지도, 이 정도면 중국산보다 다소 가격대가 비싸더라도 미국 시장에서 먹힐 만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단다.

하루가 다르게 활력을 잃어가고 있는 대구의 안경 제조 생태계를 다시 살려낼 수 있는 호기라는 생각에 오랜 기간 필자가 협업해 오던 제조사와의 미팅을 주선했다. 기대했던 대로 한국산 안경 제품의 뛰어난 마무리와 세련된 디자인에 대해 데이비드 사장은 큰 만족감을 보였다. 우려했던 바와 다르게 가격도 중국산보다 20% 정도 비싼 수준이어서 물량이 늘어나면 충분히 중국산과도 경쟁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상담이 원만히 진행되나 했는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현재 대구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하는 제조사의 자체 생산 물량이 데이비드 사장이 본격적으로 주문을 시작하게 되면 쏟아질 것으로 예상하는 수량보다 현저히 작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에는 수천 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초대형 안경 제조 공장이 성황이었다. 지금은 한 공장에 100명 넘는 직원을 보유한 곳도 찾기 힘들다. 공정별로 분산돼 있는 네트워크를 잘 활용하면 지금의 직영 공장의 생산량보다 훨씬 더 많은 물량을 소화할 수 있다고 제조사는 설명했지만, 쉽게 믿고 발주를 넣기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그 결과 디옵스가 끝난 뒤 2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필자가 연결해줬던 제조사와는 아쉽게도 샘플 주문조차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한국의 안경 제조산업이 이렇게 쪼그라든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과의 인건비와 설비 투자 경쟁에서 뒤졌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강력한 안경 소매점 소유에 대한 규제로 국내 안경 산업의 경쟁과 혁신이 지체되고, 침체된 내수로 인해 국내의 유수한 제조업체들도 영업에 큰 어려움을 겪어왔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노동집약적이고 부가가치가 낮아 보이는 산업이라는 이유로, 일찌감치 ‘사양 산업’이라는 딱지를 붙여버리고 장기적 관점에서 혁신과 투자를 멈춰버린 국내 안경 산업 전반의 분위기가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 생각한다.

높은 인건비에도 불구하고 세계 안경 시장의 지배력을 꾸준히 키워온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례를 보면 세상에 ‘사양 산업’이라는 게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장인 정신의 문화적 토대로 고급 안경 시장에서의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 자동화 생산 설비에 엄청난 투자를 지속하면서 생산성을 계속 유지하는 중국의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한 달이 멀다 하고 안경 공장 폐업 소식이 들려오는 대구의 현실을 대비해 보면 더 안타깝다.

이 시점에서 우리 안경 제조업이 가야 하는 길은 무엇인가? 데이비드 대표의 방한 목적에 그 답이 있다. 문을 많이 닫긴 했지만 아직 대구에는 평생을 좋은 안경을 만드는 데 일생을 바친 뛰어난 장인들의 네트워크가 살아 있다. 한 산업에서 이 정도 수준의 노하우를 갖춘 인력군이 있는 생태계를 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들의 노하우와 한국의 앞선 정보기술(IT) 결합을 통해 안경 제조업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야 한다.

독일 정부는 지난 10년간 '인더스트리 4.0'을 주창하며 세계 최고의 고임금 국가 독일의 제조업 생산성과 제품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해 왔다. 하지만 독일 못지않게 제조업과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 이런 혁신에 대한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쉽다. 한때 교과서적인 국제 분업을 통한 3차 산업으로의 이동을 이야기했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충실하게 IT와 금융 서비스업으로 중심을 과감하게 옮긴 미국은, 그러나 최근 제조업 기반 붕괴로 인한 후폭풍을 맞고 있다. 뒤늦게 대통령까지 나서 '메이드 인 USA'를 외치지만 한번 무너진 제조 생태계는 되살리기 힘들다.

개선된 국가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체 브랜드도 육성시켜 나가야 한다. 최근 여러 이슈로 많은 이들에게 큰 아쉬움을 주고 있긴 하지만 중소 기획사가 탄생시킨 걸그룹 피프티피프티가 단숨에 빌보드차트를 석권하는 과정은 우리에게 큰 용기와 영감을 주었다. 한국 제조업이 해외 브랜드의 생산 기지에 불과하다는 피해 의식이 우리를 결정적인 순간에 오히려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다. 세계 최고의 브랜드인 삼성과 현대, 그리고 BTS가 있는 나라인데 우리만 유독 스스로의 브랜드 파워를 평가절하하고 있다.

제조와 브랜드 혁신의 한 가지 사례로 필자가 공동 창업한 브리즘(콥틱) 사례를 공유하고자 한다. 브리즘은 한국의 안경 제조 기술과 IT를 결합해 세계 최고 수준의 개인 맞춤 아이웨어를 생산하고 판매하고 있다. 브리즘은 안경 제조 장인 기업과 IT 전문가, 3차원(3D) 프린팅 전문가, 마케팅 전문가의 연합으로 구성해 2017년 창업했다. 3D 스캐닝을 통한 얼굴 데이터 확보 및 분석, 개인 맞춤 안경에 최적화된 설계 시스템과 3D 프린팅을 통한 생산의 혁신을 통해 개개인의 얼굴에 맞춘 퍼스널 아이웨어를 10만원대에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공급자 중심의 불편과 불투명성이 지배하던 안경 업계를 소비자 중심으로 바꿔 놓으며 CES 혁신상 등 국제적 인정과 더불어 출시 이후 5년이 안 되는 기간에 3만6000장의 안경을 판매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브랜드 관점에서도 브리즘은 초기부터 미국향으로 기획했고, 미국 현지의 브랜딩 에이전시와의 협업을 통해 일찌감치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지난 8개월 동안 미국에서 진행 중인 온오프라인 팝업을 통해 500여 명의 미국 고객에게 안경을 판매해왔다. 이를 통해 확보된 자신감과 고객 데이터를 바탕으로 올해 하반기 뉴욕 맨해튼에 1호점 매장을 오픈할 예정이다.

한국에 대한 국가 이미지는 역사 이래 최고다. 그동안 한국 제품은 품질은 좋은데 브랜드력이 없고, 국가로서의 매력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그냥 '가성비' 좋은 제품의 범주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만난 그 누구라도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로 한국을 꼽고, 적지 않은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가 또는 자신이 BTS의 광팬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1990년대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의 소프트파워가 이제 한국으로 넘어온 것을 느낀다.

사양 산업이라는 무책임한 이름으로 수만 개의 일자리와 국가 성장 동력을 날려버리는 실수를 더 이상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첨단 기술과 고객 만족에 대한 집착으로 혁신된 제조업의 기반이 있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제품을 세계인의 눈높이에 맞는 수준으로 브랜드화할 수 있는 인프라는 국내외에 이미 차고 넘친다.


박형진 | 콥틱 대표
△ ALO 대표이사(2006~2012년)
△ 월트디즈니코리아 디즈니랜드 개발 담당(2005~2006년)
△ P&G코리아 마케팅본부(2002~2004년)
△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