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고용부, '직장내 괴롭힘 판단' 외부기관 힘 빌린다[곽용희의 인사노무노트]

입력 2023-07-16 11:48
수정 2023-07-16 14:57

직장 내 괴롭힘법이 2019년 7월 16일 시행 이후 4주년 맞은 가운데, 고용노동부가 직장 내 괴롭힘 판단을 전문 민간기관, 노동위원회 등 외부 조직을 활용해 전문성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한다. 괴롭힘 신고 사건 급증에, 괴롭힘 판단 기준까지 명확하지 않은 현행법 탓에 일선 근로감독관들이 감당 못할 업무 과중에 몰렸기 때문이다. 근로감독관 혼자 나가 괴롭힘 여부를 최종 판단하는 조사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 ○괴롭힘 신고, 하루22건 꼴...근로감독관 혼자 조사직장 내 괴롭힘법은 4년동안 직장 문화를 크게 바꿨다. 한 40대 직장인은 "오랜만에 유튜브에서 드라마 '미생'을 봤는데,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갈등을 빚어가면서 문제를 풀어가던 에피소드들이 요즘 같으면 직장 내 괴롭힘이더라"이라며 "몇년 새 직장인들의 사고 자체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14일 박대수 의원실이 고용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 신고는 매년 증가세다. 2020년 5823건→2021년 7774건→2022년 8961건→2023년 6월까지 4043건을 기록했다. 올해도 하루 22건꼴로 발생한 셈이다. 괴롭힘 유형별로는 폭언 1만2418건, 부당인사 5182건, 따돌림·험담 4009건, 차별 1246건 순이다.

다만 행정력이 개입할 정도로 심각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고용부가 개입하거나 검찰 송치된 사건 비중은 14% 수준이다. 전체 기소 건수가 211건에 불과해 기소율도 0.7%에 그친다. 나머지는 대부분 법 위반 없음, 취하로 결론이 났다.

이런 '신고 급증'에는 모호한 직장 내 괴롭힘 판단 기준이 한몫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괴롭힘에 대해 "직장에서의 지위·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빈도나 강도 등과 관련된 객관적 기준은 없다.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위원은 "직장 내 괴롭힘 제재 조항을 보유한 국가 중 한국만 객관적 기준이 없다"고 말한다.

이러다보니 혼자 신고받고 나가서 짧은 시간 안에 사건을 검토해야 하는 일선 근로감독관 입장에선 제대로 된 조사가 어렵다. 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은 가해자(로 몰린 사람)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로부터 불만을 사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소속 근로감독관은 "괴롭힘 사건이야 말로 근로감독관 업무 과중의 원인 1순위"라며 "근로감독관 괴롭힘 법"이라고 성토했다. "임금체불처럼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결국 고용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16일 학계에 따르면 고용부가 발주한 ‘직장 내 괴롭힘 금지제도 개선 방안 연구’가 현재 진행 중이며 9월 중 마무리될 예정이다.

연구 개요에 따르면, 고용부는 △근로감독관이 직장 내 괴롭힘 판단을 단독으로 하는 어려움 해소 및 전문성 제고 필요 △전문 민간기관, 노동위원회, 공사·공단 등 업무의 전문성 제고를 위한 조직 등 분쟁 해결 방안 △조정·중재, 구제명령 등 효율적 사건 처리 방안 검토를 요구했다.

사실상 민간기관이나 노동위원회 등 외부 기관에 조사 및 판단 맡겨 전문성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뜻이다.

주무 부서가 이럴 정도니 기업 입장은 더하다. 한 기업 인사담당자는 "내부 갈등이 생겨도 함부로 개입하지 말자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아니면 말고” 일단 신고…회사도 개입 꺼려 한 유명 플랫폼 업체에서는 최근 직급이 낮은 직원이 나이 어린 팀장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사유는 "업무 자율을 침해했다"는 이유다. 일반 기업의 상식선에선 이해가 어렵지만, '수평적 조직 문화'를 강조해 온 신생 기업들에선 흔히 발생하는 사례다.

고객이 보이는 곳에서 손톱을 깎은 직원을 혼낸 팀장이 그 직원으로부터 '괴롭힘' 신고를 당하고 위자료 1000만원 손해배상에 걸린 사건도 있다(2022나200103).

이처럼 일부 근로자들이 직장 내에서 유리한 위치를 가져가기 위해 다른 근로자를 신고하는 등 악용 사례도 점차 늘어나는 반면 허위신고자에 대한 제재 규정은 전혀 없다.

노동자만 전문으로 대리하는 김승현 노무법인 시선 대표 노무사는 "직장 대 혼란의 시대"라고 단언했다.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없이 조사에 나선 감독관과 손 쓸 생각이 없는 사업주들이 맞물려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사례도 부지기수라는 설명이다.

사건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영세사업장에서 갈등이 큰 것도 문제다. 신고사건을 업종별로 구분한 결과 제조업(4829건), 보건사회복지(4337건), 사업장시설관리(3471건), 도소매(2695건) 순으로 많다. 사실상 영세사업장이나 취약 근로자들이 몰려 있는 사업장에서 혼란이 많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직장 갑질을 근절하겠다는 법 취지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현장에서는 괴롭힘 인정 기준, 허위신고 제재 규정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위원이 올해 실시한 '직장 내 괴롭힘 허위신고 사례 분석연구'에 따르면, 허위 갑질 신고를 당한 근로자 126명을 대상으로 '직장내괴롭힘 허위신고 해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설문 조사한 결과 △허위신고자 처벌 규정 마련 △명확한 직장 내 괴롭힘 성립기준 마련 순으로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