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차 회사원인 노수빈 씨(31)는 작년 말 약 300만원이 퇴직연금 계좌에 들어왔다는 금융회사 알림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퇴직연금을 특별히 투자한 적이 없다. 노씨는 “투자 지식도 없고 일도 바빠 퇴직연금 계좌를 그냥 놔두고 있다”고 말했다. 사전 상품 지정부터 해야
노씨처럼 퇴직연금 적립금을 사실상 ‘놀리는’ 일을 막기 위해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이 12일부터 시행된다. 미리 정해놓은 곳에 적립금이 자동으로 투자되게 하는 제도다. 퇴직연금 계좌에 적립금이 새로 들어왔지만 아무런 운용 지시 없이 2주가 지나면 사전에 지정해놓은 투자상품에 투자된다. 1년 만기 예금처럼 투자상품이 만기가 됐는데 운용 지시를 하지 않아도 디폴트옵션이 발동된다.
근로자들은 우선 자신의 퇴직연금 계좌로 들어가 사전지정운용 상품을 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디폴트옵션은 발동되지 않는다. 초저위험부터 고위험 포트폴리오까지 6개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초저위험은 원금이 보장되는 예·적금 등으로, 고위험은 원금 손실 위험은 있지만 예상 수익률이 높은 타깃데이트펀드(TDF) 등 장기투자 상품 위주로 구성된다.
정부는 디폴트옵션이 지나치게 낮은 한국의 퇴직연금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7~2021년 5년간 퇴직연금의 평균 수익률은 연 1.94%였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사실상 자산이 줄고 있는 셈이다. 퇴직연금 계좌에 그냥 돈을 쌓아두는 것이 낮은 수익률의 결정적 원인이라는 게 정부 및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디폴트옵션을 적극 시행하고 있는 영국은 지난 10년간 퇴직연금 연평균 수익률이 9.9%였고, 미국은 8.4%였다. “장기투자상품으로 복리 효과 누려야”퇴직 후 노후를 대비할 만한 자산을 형성해주겠다는 제도 본래 취지를 고려하면 원금보장 상품보다는 예상 연평균 수익률이 높은 장기투자 상품을 선택하는 게 유리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디폴트옵션을 먼저 시행한 미국·영국 등은 한국과 달리 사전에 지정할 수 있는 상품군에서 예·적금은 아예 빠져 있다. 영국계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20~30년 이상 자산배분 상품에 장기 투자하는 경우 손실 리스크가 0에 가까이 수렴한다는 이론에 기반해 제도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연평균 수익률은 복리가 적용돼 투자처에 따른 장기적 자산 격차는 예상 이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은퇴 시점까지 월 50만원씩을 30년간 투자하는 경우 연평균 수익률이 3%라면 적립금은 2억9209만원이다. 하지만 5%라면 4억1786만원, 9%라면 9억2223만원으로 불어난다.
국내 TDF들은 영국·미국과 비슷하게 S&P500지수 추종 상장지수펀드(ETF) 등 인덱스 상품을 중심으로 채권·부동산 등에 분산 투자한다. 미국 경제가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한다면 영국이나 미국의 퇴직연금과 유시한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란 설명이다. S&P500지수의 지난 30년 연평균 수익률은 9.7%였다. 박희운 한국투자신탁운용 솔루션본부장은 “은퇴 후 활용할 만한 자산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복리 효과를 최대로 누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