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저마다 다른 추억을 남긴다. 쏟아지는 햇살, 파도가 넘실거리는 해변, 울창한 나무 사이로 쏘다니던 방학의 기억 등. 하지만 때로는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는 윤흥길 <장마>의 마지막 구절처럼 길고 힘겹게 지나가기도 한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린 지난 3년의 여름은 어땠을까. 소설가 김연수(53·사진)의 신작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모두가 "낯선 여름"을 보내야 했던 지난날을 위로하는 책이다. 사상 처음으로 모두가 마스크를 쓴 채 여름을 나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기도 했다. 여러 모로 '최고의 여름'은 아닐 수 있지만, 여기서도 김연수는 다정한 희망의 말을 건넨다.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작가가 마스크 너머로 독자들과 만나며 쓴 글을 모은 책이다. 지난 3년 동안 그는 독자들에게 짧은 글들을 읽어주는 낭독회를 가졌다. 2021년 10월 제주도부터 올해 6월 경남 창원까지 전국 도서관 20여 곳에서다. 짧게는 원고지 16장 분량부터 길게는 50장이 채 안 되는 소설 20편이 그렇게 묶였다.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 작중엔 많은 여름들이 등장한다. 여름과 관련한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은 기쁘거나 슬프거나 매년 반복되는 계절을 보여준다. <여름의 마지막 숨결> 속 학창 시절 친구와 갈라진 1984년의 여름부터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의 아내가 의료 사고로 죽은 여름까지 다양하다.
김연수의 주제 의식은 표제작이자 마지막 수록작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함축됐다. 소설 속 화자는 코로나19 기간 중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접한다. 슬픔과 상실감에 빠져있던 그때, 일본인 철학자 미야노가 동료와 나눈 편지를 보곤 깊은 울림을 느낀다. 미야노 역시 오랫동안 유방암을 앓던 환자였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떠나간 뒤의 여름이 "최고의 여름"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껏 자기가 겪어온 모든 "좋은 여름들" 역시 모두 이름 모를 누군가가 죽고 난 뒤의 일이었다는 이유에서다. "하나뿐인 여름이 해마다 시작된다. 그 여름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느냐는 나의 마음에 달린 문제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다시 살아갈 힘을 내게 하는"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이유를 묻지 않는 다정함을 통해서다. 책 곳곳에는 삶의 매 순간 평범하고 우연한 만남을 음미하는 따뜻한 시선이 드러난다. 이런 다정한 위로는 지난했던 여름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다시 소설집의 첫 번째 수록작으로 돌아갈 때다. <두 번째 밤>은 거듭된 포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비춘다. 두 번째 밤, 그리고 새로운 여름을 맞이하는 독자한테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날 때 세상에는 지혜가 가장 흔해진다고. 그때야말로 우리가 지혜를 모을 때라고. 평범하고 흔한 그 지혜로 우리는 세상을 다시 만들 것이라고."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