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연구기관인 나노종합기술원이 2019~2020년 385억원을 들여 만든 12인치 반도체 테스트베드. 10개 장비로 이뤄진 이 설비 가운데 A장비의 2021년 이용 건수는 8건으로 목표치 200건의 4%에 불과했다.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전혀 사용하지 않은 장비도 17개에 달했다. 수요조사도 하지 않고 예산을 마구 받아 썼다는 뜻이다. 내부 직원에게 맡겨야 할 27억원짜리 사업을 외부 교수 9명에게 나눠주다 적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과기정통부가 작년 이곳에 준 기관평가 등급은 ‘우수’였다.
과기정통부 산하 40여 개 공공기관의 기관평가가 졸속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5일 확인됐다. 기관평가 결과는 다음 연도 예산 증액과 연결된다. 문제는 심각한 운영상 과실이 감사 등을 통해 드러났음에도 ‘매우 우수’ 또는 ‘우수’ 평가를 받은 과학기술 연구소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 연구개발(R&D) 예산을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한 배경이다. ○기준 불분명한 연구소 평가
과기정통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가 관리하는 25개 출연연구소의 올해 예산은 5조8655억원이다. 이 가운데 ‘묻지마 예산’인 출연금은 2조2465억원. 이들 연구소는 경영평가를 받지 않는 ‘기타공공기관’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예산은 해마다 늘고 있다.
NST가 예산을 나눠주는 25개 출연연구소 가운데 출연금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다. 올 예산 4076억원 가운데 출연금이 2227억원(55%)에 달한다. 이곳은 연구비 부정 집행, 장비 무단 반출, 법인카드 부정 사용, 편법 정년 연장 등의 문제로 국정감사 등에서 질타를 받아왔다.
작년 말 감사원 감사에서 KIST는 기술료 징수 관리 부실, 직무발명 관리 소홀 등을 추가로 지적받았다. 2014년 3월부터 작년 9월까지 22개 창업기업에 지급한 96억원을 제대로 회수하지 않은 사실도 드러났다. 일반 기업으로 치면 업무상 배임에 해당하는 사안이다. 이런 KIST에 과기정통부는 지난달 말 최고 등급인 ‘매우 우수’ 판정을 내렸다.
출연연구소 평가는 3년마다 하는 기관운영 평가와 6년 주기 연구사업 평가로 나뉜다. 기관운영 평가는 매우 우수(S), 우수(A), 보통(B), 미흡(C), 매우 미흡(D) 등 다섯 단계로 한다. 100점 만점에 25점은 연구 보안 준수, 고객 만족도 등을 따져 매긴다. 나머지 75점은 주관이 개입되기 쉬운 정성평가로 이뤄진다. ○횡령 배임 사안에도 ‘우수’한국기계연구원은 2021년 특허 사용료 67억원 횡령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곳이다. 이곳은 2016~2021년 41건의 기술이전 계약에서 정액기술료 징수를 제대로 하지 않아 18억여원의 매출을 날렸다. 경상기술료 징수 대상 계약 210건 가운데 183건(87%)은 징수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법인카드 부적절 사용, 수당 중복 수령 문제가 잦았고 직제에 없는 보직을 만들어 수당을 챙긴 사건도 있었다. 과기정통부는 이곳에 2019년 ‘우수’, 지난해 ‘보통’ 평가를 했다.
과기정통부와 NST는 출연연구소의 자의적인 지역 분소 설치에는 손을 놓고 있다. 분소 설치에 드는 출연금 수십~수백억원이 시나브로 새고 있다는 뜻이다. 2019년부터 2021년까지 3년간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등 다섯 곳은 규정을 어기고 지역조직 31개를 운영하면서 출연금 480억원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지역조직 두 곳 설치에 대해 2019년 10월 “타당성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으나 설치를 강행했다. 생산기술연구원은 지역조직 25개를 임의로 설치해 운영하다 적발됐다.
이런 사항이 적발되면 규정상 NST는 기관평가에 반영하고 다음해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평가는 모두 ‘우수’ 혹은 ‘보통’으로 마무리됐다. 2017년 이후 지난달까지 6년 반 동안 평가 대상에 오른 NST 산하 연구소 47곳 가운데 ‘미흡’을 받은 곳은 한국화학연구원 안전성평가연구소 단 한 곳이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