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할머니의 채무를 어린 손자와 손녀들이 떠안는 상황이 앞으로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이 “자녀들이 상속을 모두 포기하는 경우 손자녀는 공동상속인이 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놨기 때문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지난 3월 23일 A씨의 손자녀 4명이 서울보증보험을 상대로 낸 승계집행문 부여에 대한 이의 신청을 기각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승계집행문은 법원이 기존 채무자의 빚을 물려받은 사람을 상대로 강제 집행하겠다고 알리는 문서를 말한다.
2015년 사망한 A씨에게는 아내 B씨와 4명의 자녀, 4명의 손자·손녀가 있었다. A씨가 남긴 재산보다 빚이 많자 B씨는 한정승인을 택했고 A씨의 자녀들은 모두 상속을 포기했다. 한정승인은 빚과 재산을 함께 상속받되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재산 한도 내에서만 빚을 갚는 제도다. 그러자 과거 A씨와의 구상금 소송에서 승소한 서울보증보험은 “A씨의 빚이 B씨와 손자녀들에게 공동으로 상속됐다”며 2020년 B씨와 손자녀들에게 승계집행문을 보냈다. 망인의 자녀들이 상속을 포기하면서 재산과 함께 빚도 후순위 상속인인 손자녀들에게 넘어간 것이다. 민법에 따르면 A씨 유족처럼 상속인이 여럿인 경우 배우자와 자녀들이 1순위 상속권을 갖게 되는데, 자녀들이 상속을 포기하면 손자녀가 배우자와 공동상속인이 된다.
졸지에 빚을 떠안게 된 손자녀들은 법원에 이의 신청을 냈지만 1심에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손자녀들은 곧바로 대법원에 특별항고해 법적 다툼을 이어갔다. 특별항고는 재판에 영향을 미친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이 있었을 때 결정·명령의 부당함을 다시 따져보자고 대법원에 직접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
대법원은 손자녀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민법 1043조는 공동상속인 중 한 명이 포기한 상속분이 ‘다른 상속인’에게 귀속된다고 정한다”며 “‘다른 상속인’에는 배우자가 포함되므로 자녀가 포기한 상속분은 배우자에게 귀속된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자녀가 상속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배우자와 손자녀가 공동상속인이 된다고 보는 것은 당사자들의 의사는 물론 사회적인 법 감정에도 반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기존 판례가 소모적인 절차를 유발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손자녀들이 그 후 법적 절차를 통해 상속인 지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기존 판례를 따르더라도 배우자가 단독상속인이 되는 사례가 많이 발견됐다”고 했다.
실제로 대법원은 과거 판결 과정에서 손자녀가 빚을 물려받더라도 향후 별도 소송을 통해 채무 상속을 포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대법원 민사3부는 2015년 한 기업이 사망한 채무자의 손자녀에게 대신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소송 역시 자녀들이 상속을 포기하면서 손자녀가 채무 변제를 해야 하는지를 두고 다툰 사례다. 당시 재판부는 “손자녀는 상속 포기를 한 다음 청구 이의 소송을 낼 수 있다”고 밝혔다.
박시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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