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해도 전통무용 공연의 매진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세련된 연출보다 고리타분한 무대, 시각적 환희보다 정적인 무대가 떠올랐다. 그런 한국 춤이 달라졌다.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61·사진)를 만나면서다. 대한민국 커리어 우먼의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 ‘구호(KUHO)’의 아버지 정구호는 ‘향연’부터 ‘묵향’ ‘산조’ ‘일무’ 등의 연출가로 활약하며 전통 무용계 흥행 보증수표가 됐다. 그의 손끝에서 한국무용은 전통미와 현대미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다. 20대부터 70~80대까지 즐기는 온 국민의 문화 콘텐츠로 진화했다. 다음달 20~22일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일무’는 미국 뉴욕 링컨센터로 떠난다. 링컨센터에서 한국 춤이 무대에 오르는 건 최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정 연출가는 “패션 디자인과 공연은 큰 틀의 ‘창작’이란 면에서 같고 표현하는 도구만 다를 뿐”이라고 말했다. 전통무용 공연에 20대 관객 가득
패션 디자이너로 유명했던 그는 제일모직 전무, 휠라코리아 부사장 등을 거쳤다. 공연 연출을 시작한 건 11년 전이다. 미국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던 시절 국내 출신 안무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공연 무대와 의상 디자인 등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공연과 연을 맺기 시작했다. 정씨는 “패션과 무용이 늘 가까이에 있었기에 첫 연출작으로 2012년 국립발레단의 창작 발레 ‘포이즈’ 제안을 받았을 때도 불안보다 자신감이 컸다”고 말했다.
전통무용에 발을 들인 건 첫 작품이던 ‘포이즈’를 안호상 당시 국립극장장(현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인상 깊게 보면서다. 안 사장은 정구호의 발레 연출을 본 뒤 국립무용단과의 협업을 제안했다. 곧 ‘묵향’(2013) ‘향연’(2015) ‘산조’(2021년) 등의 시리즈를 연달아 흥행시켰다.
“한국무용 동작은 호흡하는 방식부터 발레나 현대무용과 완전히 달라요. 한국무용만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포장하고 재해석해 식상하지 않게 보여주고 싶죠. 사실 ‘퓨전’이 가장 어렵고 조심해야 하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무용의 기본과 뿌리를 잃지 않는 선에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가 만드는 공연은 젊은 관객의 큰 환호와 박수를 끌어냈다. 객석엔 20대 관객이 넘쳐난다. “객석에 20대 관객이 많은 것을 볼 때 신기하기도 하고, 전통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는 데 작게나마 일조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정씨는 무용 공연의 안무가가 자연스럽게 작품 연출까지 맡는 기존 관행을 깨뜨렸다. 안무와 연출을 분리해 자신은 연출을 총괄하고, 안무가와 협업하는 방식으로 공연을 완성한다. 공연의 시놉시스(줄거리)를 쓰는 것부터 시작해 시나리오, 무대 디자인, 조명, 음악 등은 정씨가 직접 정한다. 무용수들의 전체적인 대형과 동선도 하나하나 확인한 뒤 안무가와 소통하며 각 장면의 안무를 짜는 식이다. 그는 “공연에서 보여주려 하는 핵심 메시지와 철학을 제외하면 스태프 의견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라고 말했다.
정구호가 만든 한국무용은 해외에서도 인기다. 사군자의 선비정신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담은 작품 ‘묵향’은 일본과 홍콩, 프랑스, 덴마크, 헝가리, 세르비아 등에서 공연했다. 오는 10월엔 미국과 캐나다에서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다. 종묘제례악 의식무에서 영감을 받은 ‘일무’는 뉴욕시티발레단 전용극장인 뉴욕 링컨센터 내 데이비드 H 코크 시어터(2586석)의 초청을 받았다. “‘일무’는 가장 전통적인 부분, 전통과 현대의 중간에서 진화하는 부분, 그리고 현대적인 부분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해외에서 보기에 단순히 신선하고 동양적인 분위기를 넘어 미학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공연을 올리려고 합니다.” “새로운 도전 할 때 살아있는 기분 들어”
정구호의 장르는 전통무용에만 갇혀 있지 않다. 오는 9월 세종문화회관 컨템포러리 시즌 싱크넥스트에서 연출을 맡은 공연 ‘그리멘토’는 학교폭력을 주제로 만든 현대무용이다. 정씨는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드라마,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인데 학교폭력을 다룬 콘텐츠를 보고 무용으로도 직접적인 사회 문제를 건드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교실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소품을 활용한 동작이 많기 때문에 무용수들에겐 다소 까다로운 작품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한 번에 여러 공연이 올라가는 경우도 많다 보니 회의가 하루에 기본 8개, 많을 땐 20개까지 있다. 하루 수면시간은 4~5시간에 불과하다. “잠은 죽어서 충분히 자면 된다”고 말하는 ‘워커홀릭’이다. 잠시 비는 시간엔 머릿속에 새로운 작품과 영감을 떠올리느라 분주하다.
“영감은 일상에서 번뜩 떠오르곤 합니다. 메모하는 걸 싫어해서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붙잡아 몇 시간 동안의 공상을 거쳐 완성해요. 공연을 연출할 땐 마지막 리허설 때 곧바로 다음 공연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죠.”
창작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고 싶다고 했다. 요즘엔 드라마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는데, 하루 다섯 시간씩 20~30쪽에 달하는 글을 쓰고 있다고 한다.
“인생에서 10년을 주기로 새로운 도전을 해요. 30대엔 디자인을 했고, 40대엔 기업에서 일하다 50대 초반에 기업을 박차고 나왔죠. 새로운 도전을 할 때 살아있는 기분이 들어요. 제 모습을 보는 사람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좋고요. 그 대상이 뭐가 됐든 저는 죽을 때까지 ‘창작’을 할 겁니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