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끊기보다 위험을 줄이는 게 낫지 않을까. 무역분쟁으로 시작해 첨단기술 패권전쟁으로 비약한 미·중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디커플링(decoupling)’에 메스가 가해져 ‘디리스킹(derisking)’이란 단어로 대체되고 있다. 팬데믹 이후 공급망 교란에 따른 원자재 가격 상승이 물가 급등을 야기했다는 우려가 작용했다.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로 불만인 네덜란드 기업(ASML)을 비롯한 서방의 불만을 무마하려면 온건한 어휘가 필요했다. 중국과 통상적 무역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유화적 제스처가 필요했다. 5월 일본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은 국제 협력을 다양화하고 심화해 디커플링이 아니라 디리스킹으로 경제 안보를 달성하자고 약속했다.
중국 당국은 디리스킹을 수사학적 궤변이라며 디커플링과의 구별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디리스킹은 위장된 디커플링이라는 것이다. 디리스킹이 핵심 기술을 포함해 중국을 세계적인 산업과 공급망에서 제거하려는 움직임이라며 단호히 반박했다. 디리스킹은 미국이 중국을 내치려고 더 많은 조작을 할 공간을 제공한다고 항변했다. 서방이 세계 2위 경제대국 없이 운영될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라고 주장했다.
그간 미국이 자국 중심 공급망 정책에만 의존하기에는 효율성과 안정성이 떨어지는 사례가 빈번했다. 미국의 공급망 탄력성 강화를 위해서는 공급망 단계별 완전한 이해, 대체 공급자 확보, 협력 네트워크 구성, 기존 계획 수정 시 실행 역량이 필요하다. 어느 하나 쉽지 않고 시간이 걸리고 성공 여부도 미지수다. 이 와중에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중국을 방문했다. 엔비디아를 비롯해 제품을 파는 미국 기업은 정부의 강경 일변도에 항의했다. 엔비디아는 고사양 반도체칩 판로가 막히자 중국 시장을 겨냥한 저사양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만들어 수출했다. 머스크는 대규모 메가팩(대용량 배터리 설비) 배터리 생산을 위해 중국에 신규 공장을 건설하려 한다. 미국 완성차업체가 중국 기업과 손잡는 건 중국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중국은 2차전지 밸류체인 내 업스트림(원재료 채굴·제련), 미드스트림(소재·부품), 다운스트림(조립) 전 부문에서 강력한 공급망을 갖추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 정부와 기업이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 14억 인구대국 중국 경제에 규제의 역설이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19년 일본 정부의 소재·부품·장비 수출규제 이후 핵심 품목의 국산화, 수입 다변화 같은 공급 안정화 노력으로 우리의 대일(對日) 무역 의존도가 낮아졌다. 희토류 규제의 역설을 상기해 보자. 1980년대까지 세계 희토류 생산량 대부분이 미국 캘리포니아주(州)에서 나왔다. 방사능과 환경오염으로 희토류 정제가 어려워지자 느슨한 환경 규제를 등에 업은 중국이 저가 공세로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세계 희토류 생산량의 50%를 차지한 캘리포니아주의 마운틴패스 광산은 경영난과 환경문제로 2002년 문을 닫았다. 불안한 미국은 2008년 몰리코프라는 회사가 마운틴패스를 인수하자 보조금을 전폭 지원했지만 회사는 2015년 파산했다.
한국 반도체업계의 전설이었던 인물이 중국에 기술을 유출한 ‘산업 스파이’로 전락한 사건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일벌백계(一罰百戒)할 일이다. 디리스킹은 디커플링이 자칫 미국과 서방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나왔다. 미국이 반도체로 중국을 때릴수록 우리 기업이 초격차 경영을 할 기회를 벌 수 있지만 위험 요인도 증가한다. 일본의 ‘소부장’ 수출 규제가 그랬던 것처럼 중국의 한국 경제 의존도가 낮아지고 자체 기술 개발로 경쟁력이 배가 되면 어찌해야 하나.
우리 반도체산업의 대중(對中) 수출 비중은 20년 사이 13배 가까이 늘었다. 중국이 엔비디아가 석권한 게임·그래픽·인공지능(AI) 분야 반도체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반도체 규제 역설이 미칠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 미래 청사진을 그려가야 한다. 중국 경제 둔화 가능성, 중국의 기술 추격, 미·중 패권경쟁 심화의 삼중고를 해결할 기업 경영의 묘수를 찾아야 한다. 대안시장을 찾더라도 시진핑 주석과 빌 게이츠의 만남에서 보듯 중국과의 경제협력은 때론 불가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