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제국’ ‘칩 자이언트(giant).’ 그동안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에 붙었던 수식어다. 최근 인텔 상황은 화려한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초라하다. 시가총액(1372억달러)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 중 8위다. 인텔이 ‘한 수 아래’로 본 경쟁사 AMD(1805억달러)에도 역전당했다.
인텔이 고심 끝에 찾은 돌파구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본격 육성’이다. 55년 중앙처리장치(CPU) 생산 노하우를 파운드리사업에 이식해 성장성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킨다는 계획이다. “파운드리에서 삼성 제친다”
인텔은 22일 투자자 대상 기업설명회(IR) 행사를 통해 “내년에 파운드리 ‘세계 2위’에 오르겠다”고 선언했다. 핵심 전략은 ‘내부 파운드리모델’이다. 칩 개발·설계 부문과 파운드리사업부(IFS)의 회계를 분리하고, 내부 거래를 통해 발생하는 매출도 IFS 실적에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인텔은 이날 “내년 파운드리 매출은 내부 거래로만 200억달러 이상 발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외부 고객사 매출까지 더하면 현재 2위인 삼성전자를 제칠 수 있다는 게 인텔의 분석이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파운드리 매출은 200억~220억달러 수준으로 추정된다.
인텔은 사업 부문 간 회계분리를 통해 제품 개발 기간 단축과 비용절감 효과도 노리고 있다. 지금까진 회계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고비용 테스트칩 생산을 수차례 반복하는 등 방만하게 운영됐다는 게 인텔의 진단이다. 인텔 관계자는 “앞으론 과도한 테스트 없이 개발에 속도를 낼 것”이라며 “2025년까지 80억~100억달러 비용을 줄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파운드리 본격 진출로 성장성 확보인텔이 파운드리사업에 힘을 주는 것은 ‘성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인텔은 개발·생산·판매 사업을 다 하는 종합반도체기업(IDM)이다. 기기의 두뇌 역할을 하는 CPU 경쟁력을 앞세워 ‘반도체 제국’으로 군림했다.
지금도 ‘CPU 세계 1위’라는 위상은 여전하다. 하지만 경쟁사 AMD가 공격적으로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90% 이상이었던 인텔 점유율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고부가가치 서버용 CPU 시장에선 AMD가 지난해 점유율 20%를 돌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텔은 ‘기술력이 뒤처진다’는 평가도 받았다. 자사 제품만 생산하느라 파운드리업체들과 경쟁하지 않은 영향으로 분석된다. TSMC 삼성전자 ‘3강체제’ 전망인텔은 앞으로 TSMC, 삼성전자 같은 파운드리업체와의 경쟁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내부 분위기부터 다잡는다. 인텔 개발·설계 부문은 내부 파운드리 역량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바로 외부 업체에 주문을 넣기로 했다. 데이비드 진스너 인텔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 55년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 혁신을 시작한다”고 강조했다.
인텔의 행보를 보는 국내 반도체업계 시각은 엇갈린다. 한 반도체업체 고위 관계자는 “CPU 경쟁력을 앞세워 ‘갑’ 역할만 하던 인텔이 고객사에 ‘을’ 역할을 해야 하는 파운드리를 잘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인텔의 제조 경쟁력과 미국 정부의 지원 때문에 삼성전자 등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