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글’. 떡 케이크 집 이름이다. 이름이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뜻도 귀엽다. 소리 없이 귀엽게 자꾸 웃는다는 뜻이다. 시집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떡 케이크를 주문했는데, 직사각형 모양의 살구색 바탕 위에 ‘문학동네 시인선 193 여름 외투 김은지 시집’이라는 글자가 초록색 앙금으로 쓰여 있다. 글자에서 앙금 맛이 난다고 생각하니 시적이다. 혹여 실수라도 할까, 짤주머니를 쥔 손이 얼마나 긴장하며 그 위를 오갔을까. 시집 모양의 케이크 한 귀퉁이에는 분홍색 앙금으로 빚은 탐스러운 꽃송이가 한가득 올려져 있다.
이런 케이크를 만나려고 그랬나 보다. 사실 이곳을 찾기 전까지 네 곳의 케이크 전문점에서 주문을 거절당했다. 시집 디자인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포기하려는데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실례지만 어떤 자리에 필요한 건가요?” “단짝인 시인이 출간했는데 첫 낭독회 자리에 필요해서요.” “그럼, 소연 님도 시인인 건가요? 오 마이 갓….” 케이크 집 사장님은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는데 이런 주문이 들어와 너무 놀라고 설렌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나도 덩달아 설렜다. 아직도 시를 좋아하실까? 요즘은 어떤 책을 읽으실까?
이제는 연락이 끊긴 문창과 친구들은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 조금 색다른 일을 하고 있을 거란 상상을 해보아도 될까. 전공보다 훨씬 마음 가는 일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면서, 각자의 삶에서 시의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을까. ‘앙글’이라는 멋진 상호를 짓는 사장님처럼. “이름을 봐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의 시를/이제 상자에 넣으려고 하는데//밝은 교실/어두운 창밖/사람들의 진지한 등//그 시를 읽었던 계절과 공간이/종이 한 장에 다/불려 온다.” 김은지의 시 ‘종이 열쇠’의 이 구절처럼 정말이지 시같이 그리운 순간들이 이 케이크 하나에 다 불려온다.
문예창작학과를 다닐 때는 수업 시간마다 친구들이 써온 시를 읽었다. A4 용지에 인쇄된 시를 두고 나는 어떤 문장에는 좋다고 별표를 치고, 어떤 문장엔 물결 표시를 한 뒤 아쉬운 점을 메모해뒀다. 언제 다시 읽을지도 모르면서 수업 시간에 받은 친구들의 시를 집으로 들고 와 상자에 담아뒀다. “다른 친구들 건 다 버렸는데 네 시는 하나도 안 버렸어.” 이런 말을 하는 친구가 더러 있었다. 친구와 서먹해진 어느 날에는 그에게 내 시를 버렸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던 기억이 있다. 시를 읽었던 계절과 공간이 얼마나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인지 안다. 그 시간을 공유한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르지는 않아도 둘러앉아 시를 읽었던 그 교실을 떠올릴 수 있고, 누군가의 문장은 가슴에 남아 있다. 언젠가 짐 정리를 하다가 버렸을 상자에서 우연히 꺼내 읽은 시는 나무 같고 풀 같고 강물 같았다. 찻잔 같고 바람 같았다. 6월에 꼭 갖고 싶은 문장 같았다.
만난 적 없는 사람을 축하하기 위한 케이크를 만드는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시가 궁금하다. 꽃 모양의 케이크만 만들다가 처음으로 시집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궁리하고 애썼을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기뻐해야지 다짐했다. 낭독회가 시작되고 준비한 시집 모양 케이크를 상자 밖으로 꺼내 놓았을 때 여기저기서 동시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를 위해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끄러움 없이 일어나 친구를 위해 쓴 발문을 읽었다.
6월, 물고기들은 산란기를 건넜고 복숭아나무 뿌리는 이제 열매 쪽으로 물을 매단다. 매실은 익어 떨어질 기세다. 앵두나무는 낙뢰와 함께 온 소낙비에 앵두를 모두 털렸다. 털린 앵두는 새의 먹이가 되겠지만 소리 없이 귀엽게 자꾸 웃는 아이의 얼굴처럼 시를 읽는 사람이 만든 케이크가 우리 가운데 놓인다. 그러면 가슴 속 연못에 가라앉았던 어떤 문장은 수면 위로 올라와 이내 출렁거린다.